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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00'의 시대 (2)

발단

by 향연 Mar 15. 2025

차를 몬 지 10여 분이 지나고, 라디오에서는 오늘따라 잠이 오는 음악만 나온다. 출발할 때보다 살짝 데워진 바람과 시트가 졸음을 더욱 유발한다.

그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하품을 하다가 그만, 그것에 시선을 빼앗겨 버린다.



칠흑 같은 어둠, 그리고 그 어둠도 미처 가리지 못해 드문 드문 드러나는 설산의 위용.


거대한 두께와 높이의 산들이 앞다투어 그 양감을 자랑한다. 어떤 산은 포효하는 듯하고, 또 어떤 산은 압도하는 위엄을, 그러나 절제하며 은근하게 드러낸다.


줄지어 끝이 보이지 않는 바위산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봉우리는 세월이 지나며 수많은 풍파에 깎여 무수히 많은 각의 모서리를 갖는다. 만월이 그에 반사되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깊이를 알 수 없는 골짜기를 밝히고 있다.


지나치게 날카로운 모서리는 본능적인 두려움과 경외 모두를 일으킨다. 해가 닿는 정도와 산의 굴곡에 따라 눈이 녹고 쌓여 생긴 명암이 시각에 다채로운 질감을 더해 준다. 모든 봉우리와 모든 골짜기가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지겨울 틈이 없다. 그야말로, 장관이다.


수평의 그림은 그가 움직이는 속도만큼 파노라마처럼 왼쪽으로 흘러간다. 흘끗흘끗 곁눈질로 바라보던 그는 어느새 입을 헤 벌리며 넋을 놓고 탐하다가 두터운 노변의 눈둔덕이 미처 방향을 틀지 못한 바퀴에 사정없이 파헤쳐지는 소리를 듣고 번뜩 정신이 든다.


설악산은 사람을 홀린다더니, 과연 틀림없구만.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흔들어 방금 보았던 것을 잊으려고 한다.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지 않으려고 애를 써보지만 이미 그의 눈꺼풀에 아로새겨진 산맥은 눈을 감을 때마다 되살아난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경치나 구경하자고 온 게 아니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운전에 집중한다.



멀리 빨간 조명이 달린 차단기가 보이자 그는 목적지에 다다랐음을 안다.

아니, 일차적인 목적지지. 이건 출발지에 불과해.

잠깐 떠오른 안도감을 다시 눌러 넣으며 서서히 주차장으로 진입한다.

 

무지개 주차장은 당연하게도, 아니 그가 ‘예상’ 한대로 아무도 없다. 적어도 ‘사람’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무서운 기분이 든다. 그는, 이미 수없이 한 조사를 통해 알고 있지만, 단차를 두고 3개로 나뉜 주차장을 한 바퀴 빙 돈 후에 차를 댈 곳을 정한다.


낡고 흙을 묻힌 파란 트럭이 있는 3층은 왠지 꺼림칙하고 어둡고, 커다란 국립공원 트럭이 있는 1층은 출입구와 지나치게 가까워 부담스럽다. 이런 이유로 그는, 그래봤자 두 대뿐이지만, 가장 많은 차가 있는 2층의 캠핑카와 소형차 맞은편에 멈춰 선다.


캠핑카 근처에 차를 두면 자연스러워 보이려나. 물론 아니겠지만 간절히 그러길 바라며 천천히 시동을 끈다.

그리고 조용히, 기다린다. 자신에 의해 깨진 적막이 다시 자리를 잡고 내려앉기를 바라듯이.


몇 분이 지나고, 이러다 다른 사람이 오면 어쩌나 하는 갑작스러운 불안감과 함께 그는 하차한다. 젠장, 긴장감에 가방을 두고 내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두 번이나 나는 것에 부담을 느끼며 가방을 꺼내고 문을 잠근다.

그리고 또 몇 초의 정적. 이제, 출발한다.     



눈이 깨끗하게 치워진 맨바닥을 걷는 그의 아이젠 소리가 짤박짤박 경쾌하다. 그는 괜히 잘못도 없는 아스팔트를 찍어 내리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든다. 눈도 잘못이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며칠 새 엄청나게 많은 눈이 내린 설악산 무지개 공원은 정문이 사람 키가 훌쩍 넘는 눈으로 막혀 있다. 당황한 그는 눈을 뚫고 들어가야 하나, 눈더미의 겉면에 내 몸의 모양대로 구멍이 난다면 신상이 너무 쉽게 밝혀지지는 않을까 고민하다가, 옆에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샛길을 발견한다. 아마도 국립공원 직원인 듯하다.


이제 새로 장만한 아이젠이 제 역할을 해줘야 할 때다. 그는 괜히 힘을 주어 눈 속에 첫발을 찍어 내린다. 콰삭 콰삭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상쾌하다.

성능 좋은데. 만족스러운 소비군.


그는 도착했을 때보다 조금 옅어진 어둠 사이로 조금씩 걸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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