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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00'의 시대 (1)

서막

by 향연 Mar 08. 2025

이른 새벽,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그가 눈을 뜬다.


시간은 오전 430. 어젯밤 일찍 잠든 덕분에 예상 시간보다 일찍 일어났음에도 몸이 개운하다.


아직 울지 않은 알람을 모두 해제하고 분주히 나갈 채비를 한다. 차가운 물로 세안을 해 정신을 깨우고 땀이 금세 마르는 내의와 얇은 기모가 든 등산 바지, 경량 패딩을 챙겨 입는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무릎 보호대도 낑낑대며 두 다리에 끼워 넣는다.



목이 탄다. 생수 한 병을 벌컥벌컥 마시려다가, 화장실에 자주 갈 것 같아 그만둔다. 최대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 그는 그다음에 무얼 하려고 했는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며 방안을 두 바퀴 돈다. 그러다가 기억이 난 듯 가방에서 핫팩을 꺼내 흔들어 놓는다. 3개 정도면 좋을 듯하다.


아침을 먹을까 하고 어제 사둔 빵 봉투를 열다가, 그만 체할 것 같은 기분에 다시 닫아 둔다. 강릉의 유명하다는 빵집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을 겨우 구해 왔다. 어제 맛을 조금 보니 꽤 입에 맞았다.



갈 곳을 잃은 그의 손이 허공을 배회하다가 아하 하는 제스처를 취하곤 양말을 집는다. 양말은 두 켤레를 신는다. 발이 시릴 것 같아서다. 안쪽에는 베이지 색 면양말을, 바깥쪽에는 울 100프로로 만든 감색 양말을 신는다. 그가 좋아하는 색깔이다.


장갑은 혹시 몰라 두 켤레를 챙긴다. 손발이 찬 그는 항상 몸의 가장 끝부분이 열을 빼앗기지 않도록 신경 쓴다. 핫팩 역시 그런 이유에서 그의 가방에 상비되어 있다.


물과 보조 배터리, 초콜릿, 녹차맛 프레첼, 휴지와 물티슈가 든 가방을 메고 잊은 건 없는지 방 안을 둘러본다. 그러다가 황급히 탁자 위에 놓인 털모자를 집어 든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머쓱해하며 모자를 쓴다.



이제 신발을 신는다. 신발장에 알 수 없는 기간 동안 묵혀둔 등산화가 제법 잘 맞는다. 태어나서 처음 사본 아이젠이란 것을 신발에 끼운다. 방법을 몰라 애를 좀 먹었지만 마치 세트처럼 등산화에 잘 어울린다.


마지막으로 급하게 구매한 등산 스틱까지. 다 차려입고 거울을 보니 제법 산행 좀 해본 사람 같다. 갑자기 왠지 모를 뿌듯함이 생기며 등산이 체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어 떨쳐버린다. 하여간..   


문을 나서기 전, 그는 귀를 덮도록 모자를 푹 눌러쓰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 한숨을 한 번 푹 내쉰다.


좋아, 진짜로 가는 거야. 이번엔 꿈이 아니라 현실이야.      



결연한 표정을 한 그가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내려 문을 열다가 달칵하는 소리에 흠칫 놀라 얼음이 된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복도에서는 문이 열리는 소리도 매우 크게 들린다. 문이 달칵하고 열리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살금살금 발끝으로 걸어 나온 후에는 아주 천천히 문을 닫는다. 문은 그의 손을 떠나 슬로우 모션처럼 아주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간다. 다-알-칵.


그 사이에 그는 아주 민첩하게 엘리베이터 앞까지 온다. 마치 307호에서 나오지 않은 것처럼. 아무도 그게 307호의 투숙객인걸 모르도록 말이다. 그는 잠금장치가 서로 꼭 맞아떨어지는 소리가 꽤 작게 들렸음에 안도하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그러다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띵-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했다니. 어떻게 이렇게 생각이 짧을 수가. 어젯밤 미리 계단 센서등이 나갔음을 확인해 두었던 걸 그만 깜박했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이겠지.


그는 열린 엘리베이터 문과 어두운 계단을 번갈아 본다. 그러다 문득 생각한다. 아니지, 내가 범죄를 저지르려는 것도 아닌데 못 탈 게 뭐람.


그의 얼굴엔 왠지 모를 자신감과 오기가 비친다. 당당해 보이려고 들썩이며 올라간 어깨와 살짝 비뚤어진 입가는 덤이다. 그러다가 괜히 CCTV에 찍혀 좋을 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까치발로 계단을 향한다. 이미 엘리베이터 안 카메라에는 어쩔 줄 몰라하는 그의 모습이 다 찍혔을 텐데. 그건 생각 못했지.  

   


아무도 없는 로비를 지나 1층 야외 주차장으로 나온다. 건너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숙소를 잘 선택했군. 이 정도야 뭐. 그는 자신의 치밀함에 은근한 자부심을 느끼며 차에 시동을 건다. 라이트는 1단만 켠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검색하고 안내를 누른다.


‘설악산 무지개 주차장’.


무지개 주차장이라니. 쳇 민영 주차장이었군. 부럽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살며시 악셀을 밟는다.

10살이 넘은 그의 자동차가 요란한 엔진음과 함께 희미한 빛을 남기며 사라진다.


아무도 모르게.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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