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자의 행복_J
리셋. 골프채를 쥐고 마음을 다잡는다. 샷 할 자세. ‘어드레스’라는 걸 하면서 나는 번민에 휩싸인 마음을 초기화한다. 그래, 뭐든 또 시작해 보면 되지 뭐. 까짓것, 후회하지 않아. 정말 후회하지 않잖아? 계속 후회하지 않을 거야……"Non, rien de rien~Non, Je ne regrette rien~"(아뇨, 아무것도~ 아뇨, 난 후회하지 않아요~) 에디트 피아프의 애달프고도 강렬한 멜로디가 내 안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이런 자문자답은 왜 하나.
스스로에게 후회하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건 행여 후회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거나 결국 후회하게 되는 건 아닌가 불안해서다. 새 일을 도모한 이후 3년이 훅 갔다. 요즘 나는 작가로 살고 있다. 직업을 묻는다면 작가다. 그러나 직업을 댈 순 있어도 과거에 비해 버는 돈이 거의 없다는 게 함정.
과거로 시간을 돌리자면 나는 지금 회사나 출입처에 있어야 한다. 오후 5시면 8시 저녁 메인 뉴스를 앞두고 한창 기사 마감에 쫓길 시각 아니던가. ‘이 기사를 꼭 써야만 하는 것이냐’는 생각에 소심하게 번민하는 어떤 날이었을 수도 있겠고. 하지만 난 지금 난생처음 회원 등록한 실내 골프연습장에서 내겐 너무도 이색적인 ‘엉거주춤 기마자세’를 하고서 두 손으로 꽉 쥔 채를 기사보다 중히 여기고 있다. 아, 참고로 말하자면 기마자세가 지나치면 제대로 된 스윙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엉덩이를 뒤로 약간 들어 올리고 양쪽 무릎도 살짝만 굽혀야 된단다. 올바른 준비 자세를 익히는 중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골프 연습장에 나가기 시작한 지 고작 3개월 차, 왕초보 골린이다. 필드 경험은 당연히 전무하다. 더 자유롭고 빛나는 삶을 살겠다는 오만하고도 천진한 욕망 덕분에 오래 천착해온 일과 조직을 떠났었다. 이후 눈 깜짝할 새 쏜살같은 시간이 흘렀다. 진부한 표현인 줄 아는데 어쩔 수 없다. 해가 갈수록 정말 그렇게 느낀다. 평범한 직장인들이 근무할 시간에 이토록 여유롭게 골프 연습에 매진할 수 있으니 당장 고정된 월급을 포기했단 사실을 나는 정말 후회하지 않는다.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기에 ‘적어도 아직까지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고쳐 말해둔다. 다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진 그럭저럭 괜찮았다. 일단 남편 K(이하 K)가 꼬박꼬박 월급 받는 회사원이라는 사실이 이기적인 내게 도움이 되고 있다. K에게 고맙다…는 말은 다음에. 희한하게도 연습 타석에 올라서면 마음이 묘하게 새로워진다. 그래, 뭐든 자꾸 새로 시작할 거야. 해보고 아님 말고 말이지!
요즘 나는 내가 문득문득 신기하다. 자유시간이 많은 것도 신기하고 월급이 없는 것도 신기하고 나는 절대 안 할 줄 알았던 골프를, 아니 골프연습을 시작한 것도 신기하다. 이른바 네트워크가 중요한 기자생활에 한창일 때도 안 하던 골프를 해보겠다는 생각을 혈혈단신 조직 밖으로 떨어져 나온 처지에 하게 될 줄이야. 그러니 지금 내게 골프는 사교나 비즈니스를 위한 것도 아니고 돈이 많아서도 아니다. 굳이 이유라면 뭔가를 새로 배워볼 시간이 있어서, 내 것이 아니라고 여겼던 낯선 것에 새삼 몰입하고 집중해 볼 정신적 여유가 생겨서, 몸을 움직여서 머리를 쉬게 할 의도 같은 게 있어서다. 돌아보면 지난 3년 내내 나는 그만하면 열심히 했다. 책도 한 권 더 썼고, 언론사 칼럼도 연재했고, 온오프라인 글쓰기 강의도 했고, 유튜브 채널도 만들었고, 이따금 강연 의뢰도 받았다. 대부분이 나에겐 새로운 시도였고 시작하는 일이었다. 시작은 설렜고 시도는 보람됐다. 다만 이 모든 것들이 그간 회사가 주던 월급에 비견될만한 수익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래선지 아직까지는 시간과 돈을 들여 경험을 산 정도로만 여겨진다. 살던 대로 살지 않고 사는 길을 달리 택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방향을 바꿀 때는 무릇 더 큰 에너지가 필요한 법이다.
골프연습장에 발을 들이게 된 건 같이 사는 K 때문이다. 아니, 덕분이다. K조차 나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 같진 않지만 그가 나를 꽤 많이 아는 건 사실이다.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는 진로 앞에서 남몰래 속 끓이는 내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보는 사람이니까. 최근 유독 한가하게 헤매고 있는 나를 그가 반강제로 인도했다. 일 밖에서 자신이 가장 강한 분야로. 나는 엉겁결에 7개월 간 30회 레슨이 포함된 연습장 회원권을 얻었다. K는 미국지도자골프연맹(USGTF)이 준 티칭 프로 자격증을 갖고 있다. 골프를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내게 그동안 그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자기가 얼마나 멀리 치는지를 자랑해 왔다. 200~300m쯤은 거뜬히 친다고 했다. 내가 언론사 취업준비생 때 상식 시험을 준비하며 무작정 외우곤 했던 ‘버디’니 ‘이글’이니 하는 골프 용어도 내게 자기 기록을 자랑하는 K 때문에 이젠 익숙해져 버렸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껏 K의 골프 실력을 실로 체감해 본 적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골프를 몰랐으니 말이다. 아예 관심도 없었다. K가 열렬히 탐닉하는 골프의 세계를 나는 괜스레 폄하했고 무시했고 종종 짜증스러워했다. 모르는 걸 좋아할 순 없잖아? 휴일에 필드로 향하는 K를 나는 타박했다.
보는 게 아니고 직접 하는 거라면, 나는 비교적 정적이고 단순한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다. 살짝 땀나는 스트레칭 수준의 운동은 나름대로 꾸준히 해왔다. 필라테스나 요가라면 크게 잘하진 못해도 하고 나면 언제나 뿌듯하고 개운했다. 많이 걷고 오래 걷는 데는 특히 강하다. 운동하면서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들 때가 많다. 정적이고 단순한 움직임은 나를 내면의 심연으로 이끌곤 한다. 이럴 때 종종 쓰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것들이 떠오르기 때문에 무척 반갑다. 반면에 한층 동적인 스포츠에는 거리감을 느낀다. 예컨대 공으로 하는 운동 대부분이 해당된다. 피구든 축구든 야구든 농구든 테니스든 배드민턴이든 탁구든. 유년시절을 돌아보면 나는 공을 내가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좀 두렵기까지 했다. 날아오는 공도, 날려야 하는 공도 왠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고 할까. 공에 대해선 줄곧 자신감이 없었다. 그런 차원에서 골프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기본적으로 채를 휘둘러야 하고 공이 멀리 날아가야 하는 종목 아니던가. 골프 또한 지극히 역동적인 운동이라고 생각했었다. 스스로를 순발력보다는 지구력이 좋은 부류라고 여기기에 ‘공을 치는’ 골프 또한 나와 맞지 않는 운동이라고 선을 그어 뒀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됐다. 연습장 3개월 차에 하는 말이라 조금 민망하긴 하다. 하지만 시작해 보기도 전에 나처럼 생각해서 취미나 여가에서 골프를 열외로 두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과감하게 짚는다. 골프는 실로 정적인 운동이라는 것. 복싱 시합도 즐길 정도로 운동을 잘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이 유독 골프만은 치지 않았던 것도 너무 정적인 스포츠란 게 이유였단 걸 최근에 알았다. 최소 주 5일은 연습장에 나가고 있다. 멈춰 있는 작디작은 볼 하나에 시선과 에너지를 최대한 집중시키면서 몰입하는 나를 발견한다. 지름 4.267cm에 불과한 작은 볼을 홀을 향해 날리면 그만인 단순한 동작을 반복 연습하면서 마치 명상하듯 의식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기분이다. 미처 몰랐던 재미다. 이건 내가 편애하는 정적인 운동이다. 정중동의 미학이 골프에도 스며 있다니……
새 꿈을 찾아 과감히 길을 나섰지만 기대보다 결과가 변변치 못해서 자꾸만 마음이 가라앉고 있었다. 뭔가 새로운 자극과 재미, 활력소가 절실했다. 뜻밖에 골프가 내게 왔다. 연습장에서 볼을 칠 때마다 무엇보다 재밌다. 당연히 잘하진 못한다. 어렵다. 하지만 재능이나 실력과는 별개로 시작하는 설렘과 배우는 기쁨이 있다. 어차피 난 골프 선수가 될 것도 아니다! 그저 가볍게 즐기면 되는 영역이다. 알게 돼서 좋아할 수 있는 게 하나 더 생겼다. 덩달아 희망이 샘솟는다. 골프 말고도 지금껏 내가 몰랐던 재미들이 세상엔 무수하지 않을까? 발견하지 못한다면 억울해질 것 같은데. 역시 새로운 재미를 발견하려면 새롭게 시작해봐야 한다. 또 하나의 빛깔 고운 시작이 나를 반긴다. 초심자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