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K라는 우연한 사수

멘토가 필요해_J

by JMJ

주말 밤 개츠비를 읽었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200쪽 남짓 비교적 짧은 분량이라 언제든 다시 읽기에 부담이 없다. 난 좋아하는 책이면 거듭 읽기 좋아한다. 그럼 왠지 진짜 내 것을 얻는 기분이 들어서. 요즘 한창 골프 연습에 빠져 있다 보니 조던 베이커가 나오는 대목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데이지 친구이고 유명 골프 선수다. 그녀가 개츠비와 데이지를 이어줘서 둘이 5년 만에 재회한다. 날씬하고 거만하고 모두가 알아보는 골프 챔피언인 그녀가 “요새 훈련 중”이라며 칵테일을 거절하는 장면에서 나는 멈칫했다. 책 보는 내내 브랜디를 홀짝이던 중이었으니까. 요즘 나는 바닐라와 캐러멜과 오크 풍미가 진하게 감도는 향긋한 이 술맛을 알게 됐다. 술을 좋아해서 거의 취해 살았던 피츠제럴드의 글은 언제나 술을 부르고 말이다. 술은 단백질 합성을 억제해 근육 성장을 방해한다. 흠, 좋은 스윙을 하려면 코어와 하체 근육이 탄탄해야 한다는데. 기분이 좋아져도 많이 마시진 말아야지.


조던 베이커는 실제 모델이 있었다. 이디스 커밍. 피츠제럴드가 프린스턴대 재학 시절 알게 된 그녀는 아마추어 골프 챔피언이었고 사교계 명사였다. 1920년대 미국 재즈시대 당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신여성들의 플래퍼 문화를 선도했던 인물이란다. 피츠제럴드 소설 속 인물들처럼 파티와 술을 즐겼던 부유하고 화려한 상류층. 별명이 ‘페어웨이 플래퍼’(Fairway Flapper)였다. 가난해서 연인을 잃었던, 또 잃을 뻔했던 피츠제럴드가 동경하는 부류였다. 그러니 이디스 커밍을 본떠 만든 조던 베이커라는 캐릭터에도 피츠제럴드의 이상과 욕망이 투영돼 있는 거다. 페어웨이 플래퍼라. 구글에서 찾은 흑백사진 속 커밍은 짧은 보브컷 헤어스타일에 종모양의 클로슈 모자를 쓰고 골프 클럽을 들고 있다. 우아하게 허리를 꺾은 피니시 자세…! 1924년 8월 25일, 그녀는 타임지 표지에 등장한 최초의 골퍼이자 최초의 여성 운동선수였다. 시간을 거슬러 그 시대에 태어날 수 있다면 나도 페어웨이 플래퍼로 살아보고 싶군. 더 자유롭고 더 독립적으로, 골프까지 잘하면서 말이다.

*사진 : 이디스 커밍(보그 사진, 1923년 12월)


아무튼 뇌 속 망상활성계(Reticular Activating System)는 역시 오차 없이 작동한다. 관심사에 부합하는 정보를 포착하는 시스템 말이다. 골프를 시작하니 곳곳이 골프다. 개츠비나 데이지도 아니고 조던 베이커 같은 조연을 다시 보게 되는 것도 그녀가 골퍼여서다. 글쓰기 강사가 될 때면 난 수강생들에게 꼭 망상활성계 얘기를 한다. 쓰고 싶은 주제를 생각하고 다니면 걸맞은 소재들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올 거라고. 그들이 효험을 봤을까? 일정기간 그들의 멘토였고 코치였던 내가 부디 도움 되는 조언을 줄 수 있었기를. 인생은 쉽지 않은데 어느 하나라도 필요한 조언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보람되냐는 생각을 하곤 한다.


특히 뭔가 배우기 시작할 때는 선생님이 있으면 좋다. 성인이 되어서도 학원 다니길 좋아하는 나를 돌아보면 그 이유 때문인 것 같다. 배움에 대한 자발적 의지나 갈증 앞에서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존재에게 의지하고 안도하며 따르게 된다. 학교가 아닌 이상 내 선생님을 내가 고를 수 있다는 것도 좋다. 성인이 되어서도 영어 학원을 다녔고, 프랑스어 과외도 받았고, 필라테스나 요가나 미술 수업도 받았으며, 지금은 골프 레슨을 받고 있다. 내가 나이를 먹을수록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점점 젊어진다. 선생님 나이는 상관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점점 더 깨닫는다. 가르침을 주는 사람은 모두 스승이다.



K는 우연히 내 멘토가 됐다. 2005년 처음 신문사에 입사했을 때 나의 첫 사수였다. 나는 그가 받은 첫 번째 수습기자였다고 했다. K 밑에서 처음으로 신문기사 쓰기 실전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신문기사에서 ‘되었다’, ‘하였다’ 고 쓴 걸 찾으면 500만 원 줄 테니까 갖고 와.” 20년 전 K가 내게 했던 이 말을 나는 아직까지 기억한다. 정작 K 본인은 잊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기사에선 예컨대 ‘되었다’는 ‘됐다’로, ‘하였다’는 ‘했다’ 식으로 모두 준말을 쓴다. 제한된 지면과 시간을 고려해 언어의 경제성을 따지는 거다. K는 자기 돈을 잃을 염려가 없었기에 내게 그런 공약을 했을 거다. 더 이상 기사를 쓰진 않지만 나는 여전히 서술어는 준말로 쓰는 편이다. 습관이 되기도 했고 그게 가독성을 더 높인다고 본다. 이건 내가 수강생들의 글을 코칭해 주면서도 한 번쯤 짚어 주는 대목이다. K는 나보다 나이가 많다. 지금은 거의 맞먹지만(?) 그는 한때 나보다 훨씬 앞서 있는 기자 선배였다. 사색과 쓰기, 독서에 대한 ‘쇼펜하우어 문장론’이란 책을 K가 내게 선물로 줬었다. ‘2006년 1월 30일’이라고 준 날짜가 적혀 있다.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고, 누구나 공부할 수 있지만, 누구나 이를 통해 사색할 수 있는 건 아니다”란 쇼펜하우어 말을 지금껏 애정한다. 읽으면서, 쓰기 전에, 깊이 생각해 보려고 노력해 왔다. K는 전통무예 십팔기 고단자이기도 하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K가 지성과 체력을 겸비했다고 생각하고 높은 점수를 줬다. 그러니까 첨에, 아주 처음 그때 그랬단 얘기다.


만약 내가 골프에 충심인 K와 함께 사는 처지가 아니었다면 골프 할 생각을 안 했을 것 같다. K는 일 안 하면 “골연장”(K는 실내 골프연습장을 줄여서 ‘골연장’이라고 말한다.)에 가고, 휴일엔 새벽부터 필드로 향하고, 골프채널로 TV를 독점하고(골프 하기 전엔 중국 무술영화만 보더니…), 집에서 자꾸만 골프 클럽을 휙휙 휘두르고, 간혹 천장과 바닥에 클럽으로 찍은 흔적을 남긴다. 그간 골프에 관심 없었던 내가 좋아했을 리 없는 대목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골프에 스며든 셈이다. 골프를 전혀 몰랐지만 골프 하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었다. 급기야 K를 따라 골연장에 가게 됐다. K가 옛날 옛적에 사서 애독한 흔적이 남아있는 벤 호건 책들을 지금 넘겨본다. 20세기 최고의 볼 스트라이커로 꼽히는 미국 골프 선수가 벤 호건이었다. 음, 이렇게 생긴 사람구나. ‘현대 골프교습의 혁신가’로 소개된 데이비드 리드베터가 쓴 ‘벤 호건 골프의 모든 것’에 호건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키가 174cm 정도인 데 비해 비교적 팔이 길었으며, 신체가 강인하고 야무졌다.” K가 제 롤모델이랬는데……둘이 체형은 닮은 것 같군. “호건은 워낙 말수가 적고 과묵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쨌거나 K도 내 앞에서 말이 적은 사람인 건 분명하다. 나는 지금 책을 읽으며 사색하고 있는 중이다. 멘토의 가장 큰 함의는 ‘영향력’이다. 그리고 선생님이나 롤모델은 끝보다는 시작을 위한 존재다. K는 과거에 내게 쓰기를 가르쳤다. 지금 나는 그에게 배우지 않는다. 골프를 시작한 나는 K에게 자꾸 뭘 묻는다. 미래에는 더 이상 묻지 않을지도 모른다.


8번째 레슨을 받았다. 나보다 분명 젊을 여성 프로가 지금 나의 골프 선생님이다. K가 아무리 실력자라도 가족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수업 진도를 나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선생님이 예를 들며 준 조언이 귀에 꽂혔다. “바이킹을 생각해 봐요, 높이 올라가서 아주 살짝 멈추는 느낌이잖아요? 그리고 내려가서 반대로 높이 올라가죠. 마찬가지로 스윙할 때 골프채를 너무 빨리 내려치면 오히려 볼을 멀리 보내기가 어려워요.” 대개 유능한 선생님들은 예를 들며 알기 쉽게 설명한다. 바이킹 같은 스윙이란 말이지……곱씹으며 연습장을 나왔다. 그러고 보니 흑백 사진 속 이디스 커밍의 폼에서도 바이킹이 보이는 것 같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