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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을 선택한 이유

by 트릴로그 trilogue

왜 하필 포르투갈이었을까?


여행 산문집의 첫 페이지를 열며, 펜이 잠시 멈춘다. 수많은 길이 열려 있던 세계의 지도 앞에서, 왜 하필 포르투갈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쩌면 삶의 우연과 필연이 조용히 겹쳐지는 지점에 있을지 모른다. 북적이는 유럽의 대도시들 대신, 내 시선을 붙든 것은 포르투갈의 조용한 풍경과 그 안에 응축된 깊은 시간이었다.


오래전, 어느 서점에서 펼쳐본 한 권의 책 속 사진이 선명히 기억에 남아 있다. 햇빛에 물든 붉은 지붕, 낡은 돌담 위를 타고 오르는 넝쿨, 그리고 멀리 펼쳐진 대서양의 푸른 수면. 이름조차 모르는 작은 마을의 그 풍경은,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어떤 갈망을 자극했다. 지도를 펼쳐 포르투갈을 다시 바라보았을 때,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끝. 마치 세상의 끝자락에 매달린 듯한 그 형상은 어딘가 애잔하면서도 묘한 끌림을 안겨주었다.


바다를 향한 끝없는 동경, 그리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돛을 올렸던 이들의 용기. 어쩌면 그것이 내 마음을 이끈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익숙한 일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낯선 풍경 속에서 세상을 다시 바라보고자 했던 오래된 열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포르투갈은 더없이 조용하고 또렷한 답처럼 느껴졌다. 유럽의 가장자리에 있으면서도 한때 세계의 중심을 향해 나아갔던 이곳에서, 나는 조금 다른 결의 시간을 마주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었다.

테주강변에서 바라본 발견기념비와 4.25 다리


대항해 시대의 기억


포르투갈은 단순히 지리적인 끝자락이 아니다. 이곳은 유럽의 역사가 대서양을 만나 새로운 길을 열었던 출발점이며, 잊힌 시간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살아 있는 박물관과도 같다. 포르투갈의 역사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켈트족과 로마인, 서고트족, 그리고 이슬람 세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명들이 이 땅을 지나며 흔적을 남겼고, 그것은 곧 오늘날 포르투갈의 독특한 문화적 색채로 이어졌다.


리스본 알파마 지구를 걷다 보면 그 깊이가 더욱 느껴진다. 미로 같은 골목과 오래된 벽, 건축 곳곳에 스며든 이슬람 문화의 잔향이 조용히 남아 있다. ‘알파마’라는 이름도 아랍어에서 비롯되었으며, 무어인들의 도시 구조가 그대로 살아 있다. 상 조르즈 성은 무어인의 요새였고, 리스본 대성당은 모스크 터에 세워졌다. 포르타스 도스 솔과 산타 루지아 전망대의 성벽과 타일에도 무어 문화가 묻어 있다. 포르투갈은 유럽과 아프리카, 동서양 문화가 어우러져 쌓인 시간 위에 자리한 도시다. 알파마를 걷는 것은 그 역사의 흔적을 따라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순간을 마주하는 일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15세기부터 16세기에 이르는 대항해 시대는 포르투갈 역사에서 가장 찬란했던 장이다. 엔히크 왕자의 주도 아래 항해술과 조선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이는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의 희망봉 도달,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의 브라질 발견으로 이어지며 하나의 거대한 해상 제국을 탄생시켰다.


이 시기, 리스본은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아시아의 향신료와 도자기, 아프리카의 금과 노예, 아메리카의 신대륙 작물들이 이 도시에 모여들며, 유럽의 끝은 오히려 세계의 중앙이 되었다. 당시의 영광은 오늘날에도 제로니무스 수도원이나 벨렝 탑에 남아 있다. 섬세한 조각과 마누엘 양식의 곡선미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세계를 향해 나아갔던 한 시대의 열망과 자신감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벨렝탑의 위용


그러나 영광의 시대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스페인과의 합병, 1755년의 대지진, 나폴레옹 전쟁 등 수많은 격랑 속에서 포르투갈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그 가운데에서도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은 도시 전체를 뒤흔든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도시의 85%가 파괴되고 수만 명의 생명이 희생된 이 재앙은, 동시에 한 도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재건의 중심에는 폼발 후작, 세바스티앙 주앙 드 카르발류 이 멜루가 있었다. 그의 지도 아래 리스본은 근대적 도시의 형태로 새롭게 태어났다. 질서 정연하게 구획된 바이샤 지구는 이후 유럽 도시 계획의 모범이 되었고, 폐허 속에서도 새로운 질서를 꿈꾼 한 도시의 의지가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늘날의 포르투갈은, 그런 역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언덕을 따라 덜컹이며 오르는 노란 28번 트램, 골목 어귀의 작은 식당에서 흐르는 파두(Fado)의 멜로디. 그곳에는 삶의 애환과 회복의 노래가 어우러져, 포르투갈만의 고유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 루이스 드 카몽이스


호카곶 기념비

유럽 대륙의 서쪽 끝자락, 포르투갈은 대항해 시대의 영광과 파두의 애수, 그리고 대서양의 거친 바람이 빚어낸 나라다. 북쪽의 포르투에서 남쪽의 리스본까지, 이 작은 나라는 로마네스크 성당부터 마누엘 양식의 수도원까지, 아줄레주의 푸른 미로와 포트 와인의 깊은 향까지, 시간과 문화가 겹겹이 쌓인 보물 상자와 같다.

햇살 아래 도루 강변을 따라 펼쳐진 포도밭, 서쪽 해안을 두드리는 파도, 아줄레주 타일로 수 놓인 건물들—그 모든 풍경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준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조금 더 느리게 흐르는 듯하다. 서두르지 않고 삶의 속도를 조절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문득 잊고 지냈던 행복의 한 조각을 떠올리게 된다.

포르투갈은 바쁜 삶 속에서 우리를 잠시 멈춰 세우는 공간이다. 스위스의 웅장함이나 이탈리아의 화려함과는 다른, 담백하지만 깊은 아름다움. 대서양을 마주한 해안의 바람, 절벽 위 등대의 고요한 불빛, 붉게 물든 석양은 말보다 긴 여운을 남긴다.

어쩌면 나는 이곳에서, 너무 바쁘게 앞만 보고 달려온 나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 같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의 강물에서 잠시 벗어나, 조용한 풍경과 느린 호흡 속에서 나만의 속도를 찾고 싶었다.

과거의 영광을 품은 채 오늘의 평온을 살아가는 포르투갈. 그곳에서 나는, 잊고 지냈던 삶의 균형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포르투와 리스본, 두 도시의 매력에 이끌린 이유


포르투갈 여행을 계획하며 가장 먼저 시선을 끈 도시는 포르투와 리스본이었다. 이 두 도시는 서로 다른 결을 지녔지만, 묘하게도 하나의 풍경처럼 조화를 이루며 여행자를 끌어당긴다. 전통과 현대, 고요함과 활기, 과거와 현재가 겹겹이 교차하는 도시들. 어쩌면 내가 진정 원했던 것은, 바로 그 ‘겹침의 미학’이었는지도 모른다.


먼저 포르투. 이곳은 리스본보다 조금 더 조용하고 깊은 울림을 품고 있었다. 도루 강변을 따라 알록달록 겹쳐진 집들, 오래된 타일로 장식된 건물들, 그리고 가파른 언덕을 따라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들. 모든 풍경이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흐름 속에 놓여 있었다. 빠름이 일상이 된 삶에서 벗어나,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고 싶을 때 포르투는 가장 자연스러운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포르투를 찾은 또 하나의 이유는 단연 포트 와인이다. 도시의 이름을 품은 이 묵직한 달콤함은 단순한 술을 넘어, 포르투의 정체성이자 자부심이다. 강 건너 빌라 노바 드 가이아의 와인 셀러들을 찾으며 들었던 와인의 역사와 만드는 과정, 그리고 직접 시음했던 순간들. 라벨루 보트가 유유히 흐르는 도루 강을 바라보며 마신 한 잔의 와인은 단순한 맛을 넘어, 이 땅의 기억과 시간을 품은 액체처럼 느껴졌다.

포르투 도루강에 유유히 떠있는 라벨루 보트


반면 리스본은 훨씬 더 다채롭고 활기찬 얼굴을 지닌 도시다. 대항해 시대의 찬란한 흔적이 거리 곳곳에 남아 있고, 그 위에 현대의 감각과 예술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벨렝 탑이나 제로니무스 수도원 앞에 서면, 과거의 위대한 항로 위에 잠시 발을 디딘 듯한 감각이 스친다. 이 도시는 유럽의 가장자리에서 세계를 향해 나아갔던 용기와 꿈을 지금도 품고 있다.


밤이 되면, 또 다른 리스본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알파마 지구의 골목길에서는 파두의 애잔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바이샤의 미술관과 디자인 숍은 낯선 여행자에게도 새로운 감각을 불어넣는다. 언덕을 오르내리는 노란 트램, 벽면을 채운 생기 넘치는 그라피티, 시장 골목의 왁자지껄한 소음까지—모든 것이 어우러져 리스본은 살아 있는 도시임을 실감케 한다.

리스본 밤거리를 누비는 트램


포르투와 리스본. 전혀 다른 결을 지녔기에, 오히려 더 아름답게 서로를 보완한다. 하나는 고요함 속의 깊이, 다른 하나는 움직임 속의 생기. 그 두 얼굴을 모두 품고 싶었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이 둘을 선택했다. 포르투갈을 향한 발걸음은 단순한 여행의 시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된 시간의 이야기를 만나고, 대서양의 바람을 타고 온 낭만을 좇아 떠나는 작은 모험이자, 내 삶의 결을 되묻는 여정이었다.


덜컹거리며 건물 사이를 가로지르던 노란 트램, 복잡한 골목 끝에서 마주한 따뜻한 인사, 오래된 시간의 향기를 머금은 거리들. 모두가 나를 조용히 반겨주었다. 과거의 찬란함은 지나갔지만, 대서양의 신비로움과 때 묻지 않은 풍경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다. 나는 지금, 포르투갈이라는 시간 속을 걷고 있다.

리스본 시내와 높이 보이는 세뇨라 두 몬테 전망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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