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하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빛을 발하다
오랜 시간 품어온 열망 끝에 시작된 포르투 여행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포르투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이스탄불은 의도적인 스톱오버 여행지였다. 낯선 동서양의 경계에서 이틀간 머물며 오래된 모스크와 시장, 그리고 보스포루스 해협의 정취를 만끽했다. 여행의 시작은 순조롭고, 설렘으로 가득했다. 다만 그 평온은 포르투로 떠나는 날 아침, 터키항공 체크인 카운터 앞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오버부킹. 여행자라면 누구나 피하고 싶은 이 단어가 마치 꼬리표처럼 따라붙어, 이틀 연속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부푼 기대는 이내 불안과 피로로 바뀌었고, 공항 라운지와 항공사가 마련해 준 숙소를 전전하며 보낸 밤들은 설렘보다는 인내를 요구하는 시간이었다. 흔히들 “무난하게 잘 간다”는 포르투갈행 길이, 우리에겐 시작부터 어긋난 채 펼쳐진 셈이었다.
이틀의 지체 끝에 셋째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포르투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기다림 속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이제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려가리라 믿었다. 악몽 같았던 이스탄불의 체류는 그제야 마무리되는 듯했고, 오랜 기다림 끝에 마주하게 될 포르투는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설렘과 기대가 교차하던 그 순간, 마침내 포르투의 공기를 마셨을 때의 벅찬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나 그 벅참은 오래가지 않았다. 도착 직후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또 하나의 시련, 바로 포르투갈 전역을 강타한 대규모 정전 사태였다. 2025년 4월 28일, 이베리아 반도를 뒤흔든 이 정전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전역을 마비시키는 초유의 사태로 번졌다. 오전 11시경, 간신히 숙소에 도착했을 무렵 도시의 분위기는 어딘가 이상했다. 창밖은 쨍하게 맑았지만, 거리의 소음과 움직임은 예상과는 달랐다. 로비에서 휴대폰을 충전하려던 나는 콘센트가 작동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함을 느꼈고, 숙소 주인조차 처음엔 단순한 고장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곧 전화를 통해 확인한 사실은, 포르투는 물론 포르투갈 전역이 정전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도시는 순식간에 멈춰 섰다. 신호등이 꺼진 교차로에서는 차량들이 엉켜 경적 소리와 불안한 시선이 뒤섞였고, 지하철과 기차는 전면 중단되었다. 리스본 공항까지 폐쇄될 정도였으니, 포르투의 교통마비는 불 보듯 뻔했다.
전기가 끊기자 식당과 카페는 일제히 문을 닫았고, 커피 한 잔조차 만들어내지 못하는 현실은 낯설고 당혹스러웠다. 현금 인출기는 일부만 작동했으며, 카드 결제가 불가능해지자 현금을 소지하지 못한 여행객들은 깊은 곤란에 처했다. 작동 중인 ATM 앞에는 긴 줄이 생겼고, 휴대폰 배터리마저 닳아가자 우리는 보조배터리에 의지해 최소한의 연결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디지털 시스템이 멈춘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불편하고 낯설었다. 미식탐험과 관광 또한 큰 제약을 받았다. 대부분의 실내 관광지는 운영을 중단하거나 입장 인원을 제한했고, 식당은 오직 현금으로만 결제가 가능해졌다. 익숙했던 디지털 결제 방식 대신 전통적인 방식으로 회귀해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여행의 흐름도 자연스레 바뀌어갔다. 그러나 불편함 속에서도 문득 새로운 질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기를 잃은 도시에서 사람들은 놀랍도록 차분했고, 혼란 속에서도 서로를 배려하며 일상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보였다. 디지털의 편의가 사라진 자리에, 오래된 방식들이 다시 생명력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 낯선 정적 속에서, 여행자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한 포르투.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러한 경험은 여행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다. 계획된 여정이 아닌,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처하며 발견하게 되는 낯선 감정들. 그 속에서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해졌고, 새로운 방식으로 도시를 기억하게 되었다. 그렇게 포르투는, 우리의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한 시작으로 남게 되었다.
혼란의 한복판에 놓였지만, 여행은 결국 멈추지 않았다. 예기치 못한 정전 사태로 대부분의 실내 명소들이 문을 닫았고, 식당이며 카페도 속속 문을 닫은 상황이었지만, 낯선 도시를 마냥 숙소 안에서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우선은 걸음을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전력은 멈췄지만, 햇살은 포르투의 언덕 위를 여전히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배터리 잔량을 아껴가며 지도를 확인하고, 사람이 오가는 방향을 따라 조심스럽게 도시의 중심으로 향했다. 전기가 끊긴 거리에는 특유의 고요함과 느슨한 긴장감이 뒤섞여 있었다. 차가 다니지 않는 골목에는 오히려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천천히 걷고 있었고, 가게 앞에는 손님 대신 주인들이 나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어쩌면 도시 전체가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한 풍경이었다.
우리는 강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루 강 너머로는 동 루이스 1세 다리가 웅장하게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정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북적대는 강변 풍경이 펼쳐졌다. 상점들은 많이 닫혀 있었지만, 대신 그 자리를 여유롭게 산책하는 사람들과 거리의 음악가들이 메우고 있었다. 전기가 멈춘 도시의 리듬은, 예상보다 훨씬 부드럽고 단단했다. 낯선 도시에서 첫발을 내디딜 때의 감정은 언제나 복잡하지만, 그날의 포르투는 조금 특별하게 느껴졌다. 문을 닫은 박물관과 멈춘 신호등 대신, 평소보다 더 천천히 걸으며 더 많은 것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고, 소란스러움 없이 조용히 마주한 장면들이 오히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했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포르투의 맥박을 따라 천천히 호흡을 맞춰가기 시작했다.
점심부터 제대로 먹지 못한 우리는 간신히 문을 연 작은 빵집을 찾아, 남아 있던 빵들을 종류 가리지 않고 집어 들었다. 계획대로라면 한참 맛집에서 해물밥을 음미하고 있을 저녁 무렵, 우리는 빵집 앞 테이블에 기대어 첫날의 식사를 그저 ‘때우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물론 맛을 논할 상황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어둠이 완전히 내리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뜻밖의 감동은 그 순간 찾아왔다. 평소라면 오후 3시를 넘기지 않고 퇴근했을 숙소 주인은, 전력난으로 불편을 겪고 있는 투숙객들을 위해 집에 가지 않고 머물며 과일과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도 조심스레 몇 가지를 챙겨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두워진 창 밖은 조용했고, 휴대폰 배터리도 얼마 남지 않은 채였다. 모든 것이 멈춘 도시 한복판, 낯선 도시에서의 첫날밤은 그렇게 깊어져 갔다.
정오 무렵부터 시작된 정전사태는 밤 8시를 넘기면서 비로소 변화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누구도 쉽게 믿지 못했다. 하지만 불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자, 묵묵히 기다리던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숙소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도 마찬가지였다.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건물들이 서서히 불빛을 되찾기 시작했고, 그 순간 포르투의 야경은 그 어떤 화려한 조명보다 더 큰 안도감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전력이 돌아왔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가,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움을 느꼈다.
돌이켜 보면, 이번 여행의 시작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스탄불에서의 비자발적인 이틀간의 체류, 그리고 포르투에서의 국가 정전 사태까지—계획하지 못했던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포르투는 여전히 단단하고 아름다웠다. 불편함과 당혹스러움 속에서도 이 도시는 고유의 리듬을 잃지 않았고, 그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적응해 나갔다. 어쩌면 그 모든 예기치 못한 순간들이, 이 여행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일지도 모른다. 해가 지고 다시 불이 켜졌을 때, 묘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정전이라는 극한의 불편함 속에서도 포르투는 포르투였고, 오히려 그 제약이 도시의 본질을 더 깊게 느끼게 해 주었다. 아무 소리 없는 거리, 디지털 없는 시간, 전기 없이도 반짝이는 타일과 고풍스러운 풍경. 그날의 포르투는, 불빛 없이도 충분히 빛나고 있었다.
현대적 편의가 잠시 멈춘 그 하루는, 포르투라는 도시가 가진 본연의 매력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시간이 되었다. 강물의 흐름, 사람들의 낮은 목소리, 오랜 벽돌 담장을 따라 걷는 낯선 발걸음들. 아무 계획 없이 흘러간 하루였지만, 그 안에 녹아든 감정과 경험은 오히려 더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것만 같았다. 포르투는, 그렇게 우리 앞에 첫인상을 남겼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하루. 내일의 포르투는 또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렇게 다시, 기대가 시작되었다.
조용한 밤, 낯선 도시의 공기는 유난히도 또렷하게 다가왔다. 모든 것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도시는 여전히 쉼의 리듬을 이어가고 있었다. 복구된 전등 불빛 아래 비로소 제대로 보이는 거리 풍경은, 마치 고요한 무대의 막이 올라간 듯했다. 마른 벽돌의 온기, 간간이 들려오는 트램 선로의 미세한 진동, 그리고 식지 않은 열기의 자취까지—모든 것이 이 도시가 가진 진짜 얼굴 같았다. 숙소 창가에 기대어 한참을 그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하루라는 시간 안에 이렇게 많은 일이 스쳐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조금은 무겁기도 했다. 동시에, 무언가에 감사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예기치 못한 변수 속에서도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여전히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었다.
이제 막 첫 장을 넘긴 포르투에서의 여정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일은 또 어떤 풍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숙소의 불이 잦아들고, 도시는 다시 어둠을 품었지만, 마음속에는 작은 불빛 하나가 오래도록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