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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열며

들어가는 글

by 트릴로그 trilogue

얼마 전, 넷플릭스를 검색하다 우연히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2024년 공개된 미국의 로맨틱 드라마로, 유명한 여행 가이드북 브랜드와 같은 이름을 지닌 이 영화는 자연스럽게 여행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를 연상케 했다. 실제로 영화는 그런 요소를 품고 있었다. 파격적인 전개는 없었지만, 진솔한 감정과 아름다운 모로코의 풍광이 어우러져 잔잔한 여운을 남긴 작품이었다. 특히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성공한 소설가 캐서린이 여행에 대해 언급한 한마디였다.


플로베르는 여행의 목적이 겸손함을 배우는 거래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작은지 보여주죠.

넷플릭스 제공 영화 '론리 플래닛'

이 대사는 묘하게도 내 마음에 깊이 스며들었다. '보바리 부인'이라는 명작을 남긴 19세기 프랑스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 그는 생애 동안 수많은 여행을 통해 자신의 문학 세계를 풍요롭게 빚어낸 작가다. 그가 말한 '겸손함'이란 단어는, 낯선 땅을 밟을 때마다 내가 느껴온 감정과도 맞닿아 있었다.


여행은 우리를 늘 익숙한 곳을 벗어나 낯선 세상으로 데려간다. 어마어마한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오랜 역사를 품은 유적들 앞에서 우리는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높이 솟은 산맥의 웅장함,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수많은 시간을 견뎌낸 돌멩이 하나조차도 유한한 삶의 나약함을 조용히 보여준다.

이러한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멈춰 서게 된다. 자신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며,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겼던 많은 것들이 얼마나 상대적인지를 깨닫게 된다. 개개인의 희로애락은 우주의 장대한 서사 속에서 얼마나 미미하며, 우리가 붙들고 있던 '중요함'이라는 감정은 때로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그 깨달음은 우리 안의 오만함을 조용히 허물고, 그 자리에 겸허함을 싹 틔운다. 그래서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내면을 정돈하는 일이다.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의 광대함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법을 배우는 실존적 경험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겸허함은 때로는 풍경 속에서, 때로는 타인의 삶 속에서, 때로는 낯선 도시의 언어와 냄새 속에서 조용히 스며든다.


리스본 중심부의 피게이라 광장

그래서일까. 여행을 준비할 때마다 나는 가슴속에 작지만 또렷한 설렘을 품는다. 마음의 지도를 펼치고, 낯선 도시의 이름을 하나하나 읊조리며, 그곳에서 마주할 풍경과 향기, 그리고 언어의 리듬을 상상한다. 이번 여정 역시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제 부부와 함께한 네 사람의 열흘은 단순히 짧은 휴가나 관광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나는 이 여행을 계획하고 이끌며, 단순한 관광이 아닌 우리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어디서부터 길을 열어갈지, 어떤 언덕을 오를지, 어느 노천카페에서 우리의 대화가 피어날지, 조심스럽게 경로를 그려 나갔다. 도시의 이름을 외우고, 오래된 골목과 카페의 온기를 미리 떠올려보며 그린 지도에는 단순한 동선이 아니라, 네 사람의 웃음과 발걸음이 겹겹이 새겨져 있었다. 여행 계획은 일정표를 넘어, 서로의 마음을 잇는 다리와 같았다. 네 명의 발걸음이 완성한 길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내 안에서 피어난 한 편의 시이기도 했다.


포르투갈, 비긴 어게인


어떤 여행은 발자취를 남기지만, 어떤 여행은 삶의 새로운 장을 열어준다. 포르투갈은 내게 그러했다. '포르투갈'이라는 이름은 오래전부터 내 안에 아련한 멜로디처럼 남아 있었다. 언젠가 도루 강 위로 노을이 물들고, 테주 강가를 스치는 바람이 뺨에 닿을 때, 그 풍경을 사랑하는 이들과 나누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대서양의 짠 내음과 오랜 역사의 숨결이 뒤섞인 서쪽 끝, 이곳에서 나는 익숙했던 자신을 내려놓고 새로운 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땅 역시 스스로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보여주는 듯했다. 황금빛 항해의 시대를 지나 대지진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리스본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포르투처럼, 포르투갈은 내게 그리고 자신에게 '다시 시작할 용기'를 불어넣었다.


포르투의 새벽 공기 속에서 도루 강은 조용히 속삭였다. 숙소 창가 너머로 보이는 붉은 지붕들과 강물이 만든 그림자를 바라보며, 나는 이 여정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임을 예감했다. 리스본으로 향하는 고속버스 안에서, 창문을 흔드는 바람결에 또 다른 지도가 내 안에 그려졌다. 오후 햇살을 머금은 테주 강의 반짝임, 언덕을 오르는 트램의 경쾌한 소리, 그리고 그 모든 풍경 위에 겹쳐지는 네 사람의 웃음. 그것이야말로 이 여행의 진정한 배경이었다.


리스본 시내를 달리는 트램

여행을 주도한다는 것은 단지 일정을 짜는 일이 아니었다. 함께한 이들의 표정과 말, 눈빛과 숨결이 이 길을 더욱 특별하게 했다. 때로는 마음속의 작은 불안을 스스로 다독이며, 때로는 동행의 시선을 통해 새로운 풍경을 배워가며, 나는 이 열흘을 조용히 채워 나갔다. 늘 그렇듯이 예상치 못한 순간들이 계획을 흔들 때도 있었지만, 그런 시간 속에서 여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리스본의 언덕길을 함께 오르며, 테주 강 너머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나는 이 도시를 세 사람의 미소로 기억하게 되었다. 여행의 주인공은 언제나 장소가 아니라, 그 길을 함께 걷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아침마다 커피 향 가득한 카페에서, 골목 어귀의 작은 와인바에서 나눈 가벼운 농담들,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하며 불빛 아래서 속삭인 이야기들이야말로 이 여정의 진정한 목적지였다.


리스본의 언덕을 오르내리며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활기를 동시에 느꼈고, 포르투의 와인 향 가득한 강변에서는 삶의 낭만과 역동성을 함께 음미했다.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호카곶의 절벽에서 광활한 대서양을 바라보며 미지의 내일을 꿈꿨고, 브라가의 고요한 성당에서는 내면의 평화를 찾았다. 발길 닿는 곳마다 이야기가 피어났고, 마주하는 모든 순간이 새로운 영감이 되었다. 그 모든 경험이 흩어진 조각처럼 모여, 나를 위한 새로운 그림을 완성해 주었다.


호카곶의 아름다운 풍광

나는 전문 작가도, 인문학자도, 예술 전문가도 아니다. 다만 다른 나라의 음식과 문화를 즐기고, 예술을 사랑하며, 성당 건축의 다채로움과 그 안에 숨겨진 보물들을 찾아보는 한 여행 애호가의 시선으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하는 것을 즐긴다.


앞으로 써나갈 글들은 단순히 포르투갈의 명소를 소개하는 것을 넘어, 삶의 전환점에서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의 기록이다. 네 사람의 발걸음으로 완성된 이야기이자, 동시에 내 마음이 담긴 기록이기도 하다. 나에게 여행이란, '길을 만드는 동시에 마음의 풍경을 새기는 일'이었다. 동시에 스스로의 역사를 다시 써 내려가는 포르투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포르투와 리스본의 바람, 그리고 그 위에 스며든 우리의 기쁨과 여운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켜, 우리처럼 서로 다른 길 위에서 만난 발자국들이 당신의 여행에도 아름답게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또한 포르투갈의 어느 길목에서 잊고 있던 자신을 다시 만나고, 당신만의 '비긴 어게인'을 시작할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 이제, 이 특별한 여정을 함께 떠나보자.


빌라 노바 드 가이아에서 바라본 포르투 히베이라 광장 일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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