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카이스, 햇살 가득한 평화
카보 다 호카의 웅장했던 대서양의 기세는 굽이진 해안 도로를 따라 이어지다 어느새 포근한 물결로 바뀌었다. 거친 절벽이 부드러운 언덕과 잔잔한 해안선으로 변하고, 차창 밖 풍경도 조금씩 달라졌다. 황량했던 바위산은 푸른 초원으로, 거센 파도는 반짝이는 잔물결로 변했다. 우버 택시가 우리를 카스카이스의 아기자기한 마을 어귀에 내려놓았을 때, 마치 다른 세상에 도착한 듯한 기분이었다.
발을 들여놓는 순간, 눈부신 햇살과 대서양 특유의 신선한 바다 내음이 우리를 맞이했다. 파스텔 톤의 건물들이 야자수와 어우러져 있고, 잔잔한 물결 위로 요트들이 한가롭게 떠 있는 풍경은 마치 그림엽서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카보 다 호카의 거친 웅장함과는 정반대의 풍경이었다. 하나는 자연의 압도적인 힘을, 다른 하나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평화를 보여주었다.
한때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던 이곳은 19세기 후반 포르투갈 국왕 루이스 1세가 여름 휴가지로 선택하면서 놀라운 변화를 겪었다고 한다. 왕실의 방문 이후 유럽 상류층이 즐겨 찾는 휴양지로 떠올랐고, 그 화려했던 역사의 흔적은 지금도 마을 곳곳에 우아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로 배어 있었다. 웅장한 저택들과 세련된 부티크 호텔들이 옛 어촌 마을의 소박함과 공존하며 카스카이스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번잡한 인파 대신 여유롭게 산책하는 사람들, 야외 카페에 앉아 햇살을 만끽하는 이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평온함을 선물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는 동안 아줄레주 타일로 장식된 예쁜 건물들과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리스본이나 포르투와는 또 다른, 한층 더 편안하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도시의 활기는 유지하되 소음은 없고, 현대적인 세련됨 속에 전통의 온기가 스며있는 그런 곳이었다. 이곳의 시간은 백사장 위로 부드럽게 밀려오는 파도처럼 느리고 고요하게 흘러갔다.
카스카이스는 단순히 아름다운 해변만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를 걷다 보면 자연이 수천 년에 걸쳐 만들어낸 경이로운 풍경들을 마주하게 된다. 먼저 독특한 바위 지형인 캄푸스 드 라피아스가 눈앞에 펼쳐졌다. 대서양의 파도가 오랜 시간 깎고 다듬어 만든 이 기암괴석들은 마치 조각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예술 작품처럼 보였다. 회색빛 바위들이 만들어낸 불규칙한 패턴 위로 파도가 부딪치며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는 모습은 한참을 바라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 너머에는 보카 두 인페르누, 즉 '악마의 입'이라 불리는 절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해안 절벽에 거대한 동굴이 뚫려 있는 이곳은 밀물 때가 되면 파도가 동굴 속으로 거세게 빨려 들어가며 굉음을 내뿜는다. 그 소리는 정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고, 자연의 엄청난 힘을 실감하게 했다. 카보 다 호카에서 느꼈던 웅장함과는 다른, 좀 더 가까이서 만나는 바다의 역동적인 힘이었다. 관광객들이 난간에 기대어 그 장면을 촬영하고 있었고, 우리도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자연의 경이로움에 빠져들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해변가 카페 에스플라나다에 앉았다. 야외 테라스에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파도 소리를 배경 삼아 모든 걱정을 내려놓는 시간을 가졌다. 오후의 따뜻한 햇살이 피부에 닿는 느낌, 바다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멀리서 들려오는 갈매기 울음소리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평화로움이었다. 신트라에서의 실망이 이미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여유를 즐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해변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니 마리나에 도착했다. 수많은 요트와 배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현대적인 요트들이 즐비한 가운데, 반짝이는 흰색 선체 사이로 보이는 낡고 작은 어선들은 이곳이 여전히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어촌임을 보여주었다. 화려한 외관과 소박한 일상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항구 주변으로는 고급 레스토랑들이 즐비하고, 신선한 해산물 요리 향기가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석양을 맞으며 테라스에서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부러워 보였다. 클루브 나발 드 카스카이스 주변으로는 요트 경기를 준비하는 선수들과 여유롭게 요트 위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고, 활기 넘치는 해양 스포츠의 분위기도 느낄 수 있었다. 이곳 사람들에게 바다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삶의 일부이자 놀이터였다.
해변을 따라 자리한 노사 세뇨라 다 루스 드 카스카이스 요새는 과거 해안을 지키던 중요한 장소였다. 견고한 석조 건물과 두꺼운 성벽이 여전히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고, 지금은 박물관이나 호텔로도 활용되어 직접 역사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요새 위에서 바라본 카스카이스 해안선의 파노라마는 또 다른 감동이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해안선과 그 너머로 펼쳐진 대서양, 그리고 발아래 평화로운 마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발을 들여놓는 순간, 눈부신 햇살과 대서양 특유의 신선한 바다 내음이 우리를 맞이했다. 파스텔 톤의 건물들—연한 노란색, 복숭아빛 핑크, 하늘색—이 야자수와 어우러져 있고, 잔잔한 물결 위로 요트들이 한가롭게 떠 있는 풍경은 마치 그림엽서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카보 다 호카의 거친 웅장함과는 정반대의 풍경이었다. 하나는 자연의 압도적인 힘을, 다른 하나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평화를 보여주었다.
해변을 거닐며 카스카이스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한 뒤, 배에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늦은 점심 식사를 위해 찾은 곳은 De Benedictis - Gastronomia Italiana였다. 포르투갈 해변 마을에서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선택하는 게 의외일 수도 있지만, 지중해 요리의 본고장들이 공유하는 신선함과 소박함에 대한 철학은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카스카이스에 온 여행자라면 바닷가 풍경에만 시선을 빼앗기기 쉽다. 하지만 골목을 걷다 보니, 파도 소리 대신 이탈리아식 소스 향이 풍겨왔다. 그곳이 바로 이 레스토랑이었다.
붉은 소스가 선명한 뇨키는 단순한 맛이었지만, 해안가 늦은 점심의 여유와 함께하니 더 깊게 다가왔다. 해산물 스파게티는 크리미한 소스와 신선한 새우가 어울려, 마치 바다를 접시에 담아낸 듯했다. 얇고 바삭한 도우 위에 루콜라와 프로슈터가 올려진 피자는 가볍지만 균형 있는 맛을 보여줬고, 라비올리 크림소스와 사프란 리소토는 우리의 피로를 풀어주는 차분한 풍미를 남겼다.
포르투갈 바닷가에서 맛본 이탈리아 음식은 의외의 조화를 이뤘다. 이곳의 햇살과 바람이 음식에 스며든 듯했고, 덕분에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장소와 기억이 함께 어우러진 한 끼가 되었다. 카스카이스는 바다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작은 골목에서 만난 이탈리아의 맛 덕분에, 이 해안 마을은 더 다채로운 빛깔로 내 여행에 남았다.
점심 식사 후 소화를 시킬 겸 구시가지 골목골목을 천천히 거닐었다. 카스카이스의 진짜 매력은 이런 좁은 골목길에 숨어 있었다. 아줄레주 타일로 장식된 예쁜 건물들을 감상하고, 아기자기한 상점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빈티지 서핑보드를 파는 가게, 수제 도자기를 만드는 작은 공방, 포르투갈 전통 섬유 제품을 판매하는 부티크까지, 각 상점마다 주인의 개성과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현지 공예품이나 독특한 기념품을 둘러보거나 작은 갤러리에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한 갤러리에서는 카스카이스의 해변 풍경을 담은 수채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작가가 포착한 빛과 색감이 우리가 직접 본 풍경보다 더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기념품으로 작은 아줄레주 타일 하나를 구입했다. 집에 돌아가서도 이 평화로운 오후를 떠올릴 수 있는 작은 증표였다.
골목을 빠져나와 다시 해변가로 향하는 길에 Casa Portuguesa do Pastel de Bacalhau - Cascais를 발견했다. 포르투갈의 별미 중 하나인 바칼랴우 페이스트리를 맛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이미 점심을 든든히 먹었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 하나 주문했다. 갓 튀겨낸 페이스트리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났고, 한입 베어 물자 바삭한 겉면이 부서지며 부드러운 대구살과 고소한 치즈가 입안 가득 퍼졌다. 짭조름하면서도 고소하고, 크리미 하면서도 느끼하지 않은 그 절묘한 균형이 인상적이었다. 카스카이스에서의 미식 여정에 특별한 방점을 찍어주는 맛이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카스카이스 역으로 향했다. 역은 마을 중심부에서 가까워 걸어서 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 역 플랫폼에 서서 들어오는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오늘 하루를 되짚어보았다. 신트라에서의 실패로 시작된 하루가 카보 다 호카의 웅장함을 거쳐 카스카이스의 평화로움으로 완성되었다.
리스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해 질 녘의 아름다운 해안선 풍경이 아련하게 펼쳐졌다. 기차는 해안선을 따라 달렸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노을빛에 물든 바다, 실루엣으로 변한 야자수들, 멀리 보이는 등대의 불빛까지. 카스카이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에게 아름다운 이미지를 선물했다.
카스카이스에서 보낸 평화롭고 햇살 가득한 시간들은 소중한 추억으로 가슴에 새겨졌다. 이곳에서 시간은 마치 멈춘 듯 흘렀고, 그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휴식과 내면의 활력을 되찾았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던 여행이 오히려 더 특별한 경험이 되었다는 것을, 카스카이스는 부드러운 파도 소리로 증명해 주었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변화가 더 큰 선물을 가져다준다. 신트라의 화려한 궁전 대신 우리는 유럽의 끝에서 시작을 보았고, 시간이 멈춘 듯한 해변 마을에서 진정한 평화를 발견했다. 그것이 바로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기차가 리스본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에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