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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트라의 아쉬움, 카보 다 호카의 위로

세상의 경계를 마주하다

by 트릴로그 trilogue


동화 속 마을에서 마주한 현실


호시우 역에서 신트라행 기차에 올랐을 때, 나는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페나성을 상상하며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1887년 건립된 네오 마누엘 양식의 말발굽 모양 아치가 인상적인 호시우 역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현재는 신트라 선만 남아 있어 신트라로 향하는 여행객들의 필수 출발점이 되었다.


호시우역 건물 중앙의 말발굽 모양의 입구가 독특하다
“Homenagem ao Fado” 파두 연주 모습을 표현한 동상이 이채롭다
신트라行 기차 탑승 직전


기차 안에서 흥미로운 만남이 있었다. 마주 보는 앞자리에 앉은 페루 가족—8살, 5살 남매를 데리고 여행 중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5살 꼬마가 눈에 띄어 가방에서 초콜릿을 꺼내 건넸다. 처음엔 수줍어하며 손을 내밀지 않던 아이가 엄마의 격려에 겨우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초콜릿을 받아 가는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신트라역에 도착하면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우버 택시를 잡기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20여 분 올라 페나성 매표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2시 30분. 우버 기사와 3시간 뒤 다시 만나기로 하고 매표소로 향했는데, 그곳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신트라역에 도착하여 우버택시를 기다리는 관광객들


티켓은 이미 대부분 매진. 그나마 남은 표는 오후 4시 30분 입장분이었다. 성수기의 신트라는 나의 안일함을 용납하지 않았다. 미리 온라인으로 예매하지 않고 현장 매표를 시도한 것 자체가 실수였다. 아쉬움과 실망감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아. 여행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선물을 주니까.


페나성 입장하는 사람들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운 좋게도 매표소 근처에서 우버 기사를 쉽게 찾았다. 상황을 설명하자 다른 장소를 안내해 주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차라리 카보 다 호카로 가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결국 신트라 관광을 포기하고 카보 다 호카와 카스카이스를 묶어 차량을 대절하는 형식으로 신트라 요금까지 포함해 100유로에 흥정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가 타고 다닌 우버택시의 모습


아쉬움 가득했던 신트라를 뒤로하고, 차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벗어나 해안선을 향해 달렸다. 창밖 풍경이 빠르게 변했다. 울창한 숲과 신비로운 성들이 사라지고, 드넓은 초원과 거친 해안 절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동화 속 세계에서 벗어나 자연의 웅장함이 지배하는 다른 세상으로 들어서는 듯했다. 신트라에서의 아쉬움은 곧 새로운 기대로 바뀌어갔다.






세상의 경계, 카보 다 호카


카보 다 호카. 포르투갈어로 '호카 곶'을 의미하는 이곳은 유럽 대륙의 가장 서쪽 끝이다. 단순한 육지의 끝이 아니라, 무한한 대서양이 시작되는 지점이자 대항해시대 미지의 세계를 향한 인류의 담대한 도전이 시작되었던 상징적인 공간이다.

카보 다 호카 도착 직전의 모습


카보 다 호카에 발을 들이는 순간,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거침없이 몰아치는 바람과 대서양 특유의 짠 내음이었다. 폐부 깊숙이 들이마신 짠 내음은 문명 세계의 모든 잔상을 지워버리고, 오직 자연의 웅장함과 존재의 순수함을 느끼게 했다.


해발 140미터 높이에서 바다를 향해 깎아지른 절벽은 그 자체로 압도적이었다. 절벽 아래로 거대한 대서양의 파도가 쉴 새 없이 부딪히며 하얀 포말을 일으키고, 그 소리는 태초부터 이어져 온 자연의 합창 같았다. 도시의 번잡함과 일상의 소음이 닿지 않는 이곳에는 오직 자연의 웅장함만이 존재했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강렬한 바람은 마음속 모든 번뇌와 미련을 대서양 너머로 날려버리는 듯한 깊은 해방감을 주었다.

주위의 멋진 풍광을 배경으로 서 있는 등대는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아름다웠다


절벽 위 기념비에 새겨진 문구가 가슴을 울렸다. 포르투갈의 대시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의 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에서 발췌한 구절, "AQUI... ONDE A TERRA SE ACABA E O MAR COMEÇA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이 문장은 단순한 지리적 묘사를 넘어 미지의 세계를 향한 인간의 불굴의 용기와 탐험 정신을 상징한다.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해를 찬양한 이 서사시는 카보 다 호카가 지닌 "알려진 세계의 끝"이라는 상징성을 더욱 확고히 한다.

기념비에는 이 감동적인 시구 외에도 정확한 지리 정보가 새겨져 있었다. 위도 38° 47', 경도 9° 30', 해발 140미터. 숫자로 증명되는 유럽 대륙 최서단의 위치였다. 실제 대항해시대 선박들은 리스본이나 사그레스에서 출항했지만, 이곳은 유럽을 뒤로하고 미지의 바다로 나아가는 도전 정신을 대표하는 상징적 장소로 오늘날까지 그 의미를 이어오고 있다.

왼쪽 사진은 카몽이스의 시구가 적혀 있는 기념비, 오른쪽은 다녀간 사림들의 흔적이 있는 스티커와 낙서들


절벽 끝에 서서 끝없이 이어지는 수평선을 응시하는 경험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푸른 바다와 거친 회색빛 절벽만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우리는 한없이 작아지는 동시에 묘한 평온함을 느꼈다. 신트라에서 채우지 못했던 아쉬움마저도 카보 다 호카의 장엄한 풍경 앞에서 기꺼이 위로받았다. 예상치 못한 선택이 이토록 큰 감동과 깨달음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저 평온해 보이는 바다 너머의 세계를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간 모습이 존경스럽다

카보 다 호카는 시끌벅적한 관광지가 아니다. 이곳의 유일한 배경음악은 거친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다.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풍경은 복잡한 생각들을 잠재우고 내면의 평화를 찾아준다. '세상의 끝'이라는 말이 주는 막연한 불안감보다는, 오히려 끝이 있기에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얻었다. 대항해시대의 포르투갈인들이 그러했듯, 이 끝을 넘어 미지의 세계와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아갈 용기를 얻는 곳이었다.


진정한 감동의 의미


카보 다 호카에는 별도의 숙박시설이 없다. 기념품 숍과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카페, 관광 안내소, 그리고 해발 165미터에 1772년 건립되어 250년 넘게 바다를 비추고 있는 외로운 등대가 전부다. 그렇기에 이곳은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며 방문객들에게 더욱 진정한 감동을 전한다.

카보 다 호카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사진

해 질 녘 노을이 대서양을 붉게 물들이는 시간에 방문했다면 그 감동이 배가되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깎아지른 절벽에 서서 거대한 대서양을 파노라마처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카보 다 호카는 그 자체로 충분히 깊은 인상과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신트라에서의 실패가 카보 다 호카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기에 얻은 예상치 못한 선물. 자연의 웅장함과 인류의 위대한 역사가 교차하는 이곳에서, 나는 고독과 평화, 그리고 새로운 영감을 동시에 경험했다. 여행은 때로 계획을 벗어날 때 오히려 빛날 수 있다는 것을 카보 다 호카는 가르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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