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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포르투갈은 여전히 내 안에 산다

by 트릴로그 trilogue

다시, 사우다드


서울로 돌아온 지 벌써 여섯 달이 지났다. 버스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기울고, 오후 네 시쯤 건물 사이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울 때면 나는 문득 멈춰 선다. 그 순간, 포르투갈이 불현듯 내 안으로 돌아온다. 도루강변을 걷던 어느 오후가 떠오른다. 강바람에 실린 강물 냄새와 와인 저장고의 나무통 향이 섞여 있었다. 동루이스 다리의 그림자는 강물 위로 길게 늘어졌고, 사람들은 난간에 기대어 말없이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랬다. 서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비가 내린 다음 날, 포르투의 돌계단은 미끄러웠다. 히베이라 지구 골목을 걸으며 조심스레 발을 디뎠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창문을 여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트램 소리. 그 모든 소리가 뒤섞여 도시의 아침이 천천히 깨어났다. 첫날엔 갑작스러운 정전이 있었다. 저녁까지 이어진 정전사태에 숙소 창밖은 어둠에 잠기고, 거리의 소음마저 사라졌다. 한참 후 불이 돌아오자 창문마다 하나둘 불빛이 켜졌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 불빛들이 묘하게 마음을 안정시켰다. 포르투는 그렇게, 조용히 시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도시였다.


브라가에서는 봉 제수스 성당 꼭대기에서 시작해 계단을 내려왔다. 중간에 세 번쯤 멈췄다. 숨을 고르기 위해, 그리고 뒤를 돌아보고 싶어서. 분수에서는 물이 흘렀고, 순례자들은 천천히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성당 벤치에서 얼마 동안 앉아 붉은 지붕과 하얀 건물, 멀리 펼쳐진 산과 브라가 시내를 바라봤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앉아 있었다.


리스본에 도착한 날은 화창했다. 버스터미널에서 나오자 햇살이 쏟아졌다. 숙소에 도착하여 코메르시우광장까지 걸으며 테주강의 윤슬을 봤다. 처음 본 리스본은 생각보다 밝았고, 생각보다 따뜻했다. 리스본에서의 일주일은 걷고 앉기를 반복한 시간이었다. 알파마를 걸었고, 트램 28번을 탔으며, 벨렝을 찾았고, 산타 루치아 전망대 앞에 한 동안 앉아 있었다. 관광객들은 사진을 찍고 떠났지만, 나는 더 오래 머물고 싶었다. 햇살에 따라 주황색 지붕의 색이 변하는 걸 보며, 오후 네 시의 빛과 다섯 시의 빛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았다.


카보 다 호카까지는 기차와 택시를 타고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유럽 대륙의 끝, 절벽 위에서 대서양을 바라봤다. 바람이 너무 세서 모자를 꽉 눌러 써야 했다. 기념비에 적힌 "여기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라는 문구 앞에서 사진을 찍었지만, 세찬 바람 탓에 아내는 머리카락이 흩날려 제대로 나온 사진이 없다고 아쉬워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 바람과 파도 소리가 훨씬 중요했다. 돌아오는 길에 원래 계획에 없었지만 우연히 들른 카스카이스는 작은 해변 마을이었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파도를 바라봤다. 현지인들이 개를 산책시키고, 바닷가에 아이들이 뛰어놀았다. 그렇게 한동안 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11일간의 포르투갈 여행을 돌아보면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잠시 길을 잃기도 하고, 비를 맞기도 했으며, 기대에 미치지 못한 음식을 먹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든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느긋했다. 카페 주문도, 버스도, 식사도 늘 늦었다. 처음엔 답답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그 리듬에 익숙해졌다. 급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은 광장에 앉아 수다를 떨고, 강변과 전망대에서 해 질 때까지 맥주를 마시며, 카페에서 신문을 읽으며 오후를 보냈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나는 여전히 예전처럼 빠르게 움직인다. 지하철과 버스를 타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식사를 서둘러 마치며, 약속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둔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멈춘다. 카페에 조금 더 앉고, 강변을 천천히 걷고, 하늘과 숲 그리고 노을도 조금 더 오래 바라본다.


사우다드. 포르투갈어로 '그리움'이라 번역되지만, 정확히는 그렇지 않다. 있던 것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없던 것에 대한 그리움.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 단어를 이제 조금 이해할 것 같다. 포르투갈은 이미 지나간 여행이지만, 동시에 아직 끝나지 않은 무언가로 내 안에 남아 있다. 언젠가 다시 가게 되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곳이 여전히 내 안에 산다는 사실이다.


돌아올 때 가방에는 특별한 게 별로 없었다. 아줄레주 마그네틱 몇 개, 포르투갈 접시, 포트 와인과 도루밸리산 레드와인 세 병, 정어리 통조림 몇 개. 벨렝의 파스텔 드 나타 상자는 공항에서 이미 다 먹어버렸다. 진짜 가져온 건 따로 있다. 산타 루치아 전망대에서 본 오후 네 시와 다섯 시의 완전히 다른 주황빛 지붕, 동루이스 다리 위에서 바라본 도루강의 풍경, 브라가 계단을 내려오며 떠올린 생각들, 카보 다 호카의 바람, 카스카이스 해변 카페의 조용한 오후.


사진은 휴대폰으로 약 2,000장 가까이 찍었는데, 그중 백 여장 정도만 자주 본다. 빨래가 늘어진 골목의 고양이,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벨렝 탑, 렐루 서점의 붉은 계단. 사진만으로는 담지 못한 것들—책 냄새,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의 소리, 성당의 고요함—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남았다. 각 도시의 빛은 달랐다. 리스본은 부드러웠고, 포르투는 날카로웠으며, 카보 다 호카는 거칠었다. 아줄레주 타일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지하철역, 기차역, 성당, 주택 곳곳에. 깨진 타일도 많았지만, 오히려 그 낡음이 좋았다.






다시 돌아갈 이유 그리고 비긴 어게인


처음엔 포르투갈을 충분히 봤다고 생각했다. 11일이면 긴 시간이라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자꾸 떠올랐다. 가보지 못한 곳—신트라, 나자레, 라고스, 코임브라—도 많지만, 다시 가고 싶은 진짜 이유는 그곳들이 아니다. 알파마 골목을 지도 없이 다시 걷고 싶다. 트램 28번을 다시 타고, 이번에는 앉아서 해 질 무렵의 도루강변을 다시 보고 싶다.


포르투갈은 과거를 그대로 둔다. 낡은 건물을 부수지 않고, 오래된 트램을 운행하며, 좁은 골목을 넓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새로운 카페가 생기고, 젊은 예술가들이 벽화를 그린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다투지 않고, 조용히 공존한다. 그게 포르투갈이 준 가장 큰 인상이다. 급하지 않다는 것. 무언가를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과 동명(同名)의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은 어느 날 모든 것을 두고 리스본행 기차를 탔다. 나는 물론 그렇게 극적이지 않았다. 이스탄불의 스톱오버를 합하면 2주간의 여행이었고, 끝나면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에서 보낸 시간은 분명 달랐다. 무엇이 달랐냐고 묻는다면, 선뜻 답하기 어렵다. 더 여유로워졌다거나, 인생관이 바뀌었다거나 한 건 아니다. 다만, 어떤 것들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서울에 돌아와 사람들을 조금 다르게 보게 되었다. 모두 어딘가로 향하고, 모두 자기 삶을 살아가며, 모두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이어간다. 리스본 트램 안의 할머니처럼, 알파마 계단을 오르던 노인처럼, 포르투 도루강변을 걷던 사람들처럼.


포르투갈은 답을 주지 않았다. 질문도 명확히 만들어주지 않았다. 그저 잠시 멈추게 했고, 그 멈춤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돌아와서야 알았다. 트램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바다 냄새도, 도루강의 바람도 없다. 하지만 버스 브레이크 소리, 카페의 스팀 소리 속에서 가끔 그 나라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럴 때면, 조금 덜 급해지고, 조금 더 천천히 걷고, 조금 더 오래 앉는다. 그것이 포르투갈이 내게 남긴 것이다.


다시 '리스본행 야간열차' 속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우리는 어떤 곳을 떠날 때 우리의 일부를 남긴다. 떠나더라도 그곳에 머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언가는 그곳에 돌아가야만 찾을 수 있다. 어떤 곳에 갈 때, 자신을 향한 여행이 시작된다."

포르투의 골목을 걷고, 리스본의 언덕을 오르며, 카보 다 호카의 절벽 끝에 서서 나는 조금씩 나의 일부를 그곳에 남겼다. 동행과 나눈 웃음, 낯선 언어로 주문한 커피, 성당의 고요함. 그 순간들이 이제 포르투갈 어딘가에 새겨져 있다. 동시에 나는 포르투갈의 일부를 가지고 돌아왔다. 리스본의 회복력, 도루강변의 낭만, 브라가의 고요함. 무엇보다 스스로를 새롭게 써 내려가는 용기를 배워왔다.


프롤로그에서 이 여행을 '비긴 어게인'이라 불렀다. 이제는 안다. 진정한 비긴 어게인은 돌아온 후에 시작된다는 것을. 여행은 끝났지만, 자신을 향한 여정은 계속된다. 11일은 짧았지만, 충분히 멀리 갔다. 카보 다 호카가 아니라, 내 안의 어딘가까지. 그곳에서, 잠시 잊고 있던 나를 다시 만났다.


"여기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카보 다 호카 절벽 끝에서 카몽이스의 문장을 읽었다. 땅의 끝에서 바다를 봤고,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그 경계의 감각은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다. 포르투갈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언젠가 다시 갈 것이다. 급하지 않게, 준비가 될 때, 같은 카페에 앉아 같은 커피를 마시며, 달라진 나를 확인하면서. 어쩌면 당신도 어딘가에 자신의 일부를 남겨두었을지 모른다. 혹은 아직 찾지 못한 자신이 낯선 도시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곳으로 향할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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