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 반, 호텔 로비에 도착하니 먼저 와 있던 김 변호사 부부가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아침에 체크아웃하며 맡겨둔 캐리어를 찾아 다시 거리로 나서니, 오후의 햇살이 건물 사이로 비스듬히 쏟아졌다. 테르미니역까지는 걸어서 10분 남짓. 역 주변의 분주한 풍경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이제 곧 로마를 벗어나 움브리아의 언덕 마을로 향한다는 실감이 조금씩 밀려왔다.
역 한쪽에 늘어선 렌터카 업체들 사이에서 예약해 둔 로컬 업체 '이탈리 카 렌트'의 사무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해외여행에서 렌터카를 이용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글로벌 업체를 선택했지만, 이번에는 가성비가 좋은 로컬 업체를 택했다. 다소 우려스러운 후기가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을 거라며 아내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나 역시 내심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렌터카 픽업 절차는 예상보다 두 배 이상 오래 걸렸다. 보통은 예약 바우처, 여권, 신용카드, 운전면허증을 제출하면 30분 이내에 차량을 받을 수 있지만, 이번에는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차를 인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직원이 겁을 주는 바람에 불안해져 예약한 조건에서 추가로 보험을 보강했다. 12일 동안 추가 운전자 옵션까지 포함해도 비용은 110만 원이 채 되지 않았으니 가성비 면에서는 만족스러웠다.
특히 해외에서 자동차 보험은 풀 커버로 가입해야 마음이 편하다. 차량 상태도 좋은 것으로 요청했더니 약간 업그레이드된 차가 배정되었다. 주행거리도 27,000km 정도로 비교적 양호한 상태라 안심할 수 있었다. 차에 시동을 걸고 내비게이션에 아시시를 입력하자, 화면에 2시간 반이라는 예상 소요 시간이 떴다. 이제 드디어 여덟 명 전원이 모이는 아시시로 향할 시간이다.
성 프란체스코와 성녀 키아라의 고향, 아시시.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성당들과 수도원이 고스란히 보존된 이곳은 전 세계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가톨릭의 성지다. 로마에서 약 200km, 차로 2시간 반 거리에 자리한 이 중세 도시를 향해 우리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초행길에다 수동기어 렌터카라는 변수가 있었지만, 로마 도심을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 이내 적응하며 순조롭게 달릴 수 있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움브리아의 풍경은 로마의 웅장함과는 사뭇 달랐다. 완만한 언덕 위로 올리브나무와 포도밭이 이어지고, 그 사이사이로 중세 성벽을 두른 작은 마을들이 점처럼 박혀 있었다. 다만 프란체스코 성당에서 석양을 감상하려던 계획만큼은 아쉽게도 이루지 못했다. 루트를 잘못 선택하는 바람에 예상보다 30분이 더 걸렸고, ZTL 구역을 피해 안전한 경로로 우회하다 보니 시간이 더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Z.T.L.(Zona Traffico Limitato), 즉 '도심 내 차량 제한 구역'은 이탈리아 렌터카 여행자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사항이다. 중세 도시들의 특성상 골목이 좁고 주차 공간이 극히 부족한 탓에, 유적 보호와 대기오염 방지를 목적으로 많은 도시가 중심가를 ZTL로 지정하고 있다. 이 구역에서는 차량 통행이 엄격히 제한되며, 위반 시 상당한 벌금이 부과되므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나중에 렌터카를 반납한 뒤에도 몇 달 후 집으로 벌금 고지서가 날아오는 경우도 흔하다고 하니, 처음부터 아예 들어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처음 예약한 호텔은 아시시 중심부 깊숙이 위치해 성문을 지나 한참을 들어가야 했다. ZTL 구역 통과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주요 관광지인 프란체스코 성당과의 거리가 멀어진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고심 끝에 성당과 더 가까운 호텔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프란체스코 성당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쾌적하고, 합리적인 요금까지 갖춘 호텔을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삼박자'를 두루 갖춘 숙소를 발견하는 과정 자체가 여행의 중요한 일부이자 즐거움이다. 요즘은 블로그나 유튜브를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최근에는 ChatGPT 같은 AI 도구를 활용하면 여정, 호텔, 식당 정보를 일일이 검색하는 수고를 덜 수 있게 되었다. 적절한 질문만 던지면 원하는 답을 빠르고 정확하게 얻을 수 있으니, 기술의 발전이 참으로 놀랍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상상도 못 하던 일들이 현실이 된 신기한 세상. 앞으로 얼마나 더 놀라운 변화가 펼쳐질지 기대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다. 이제는 인생을 현명하게 즐기려면 신기술과 신문명에 익숙해지는 것이 필수인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섬세한 감성과 인간적인 터치까지 완벽히 대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멋진 결과물은 기술과 인간의 감성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해가 기울어 가는 시간, 아시시의 성벽이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언덕 꼭대기를 감싸고 있는 중세 성벽과 석조 건물들이 저녁 햇살을 받아 따뜻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일몰 직후의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작은 위안이었다.
호텔 가까운 곳까지 차를 몰고 가 아내들과 캐리어를 먼저 내려놓은 뒤, 근처 공영주차장으로 차를 이동시키는 등 기민하게 움직였지만, 결국 체크인은 일몰 시간을 넘긴 후에야 이루어졌다. 아시시에서 하루 머물기로 한 호텔 소렐라 루나(Hotel Sorella Luna)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곳이었다. 공영주차장 위치를 직접 확인한 후, 언덕을 따라 이어진 가파른 길을 올라 산 피에트로 문(Porta S. Pietro)을 통과했다. 성문을 지나자마자 상점 옆 공터에 잠시 차를 세우고 캐리어를 내려놓은 뒤, 다시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량 진입이 제한되어 캐리어를 끌고 약 3분간 살짝 경사진 길을 걸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호텔 진입로에서 리셉션까지 계단이 있었고, 엘리베이터가 없어 2층 객실까지 캐리어를 직접 들고 올라가야 했다. 하지만 객실 내부는 깔끔하고 현대적이어서 그런 불편함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다. 창문을 열자 아시시의 골목길과 멀리 움브리아 평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나중에 합류한 일행들의 부인들도 모두 만족해했다는 점에서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머지 일행이 로마 공항에서 만나 렌터카를 픽업하고 아시시로 오려면 최소 3시간은 걸릴 터였다. 호텔 프런트에 부탁해 근처 식당을 추천받았지만, 이미 저녁 8시를 넘긴 시간이라 대부분 마감했거나 호텔에서 다소 거리가 있는 곳뿐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찾아보니 5분 거리에 작은 로컬 레스토랑(Ristorante La Dimora)이 있었다. 식당 마감은 9시 반이지만 마지막 주문은 8시 반까지라고 했다. 이미 8시 반이 살짝 넘어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지만, 간절히 부탁하자 잠시 기다려 보라더니 결국 입장을 허락해 주었다.
기쁜 마음에 근처에서 다른 식당을 물색하던 일행들을 불러 모아, 서둘러 대표 메뉴 몇 가지와 로컬 맥주를 주문했다. 아시시 입구에 자리한 이 식당은 모든 면에서 인상적이었다. 직원의 친절하고 세심한 서비스, 정성이 가득 담긴 움브리아 전통 요리들이 푸짐하게 제공되었다. 트러플 파스타는 향이 진하면서도 깊은 풍미를 자랑했고, 양고기 스테이크는 완벽한 익힘 정도로 육즙이 살아있었다. 겉은 바삭하게 구워지고 속은 부드러운 로제 색을 유지한 그 양고기를 한 입 베어 물자, 로즈마리와 마늘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카프레제의 신선함도 빼놓을 수 없었다. 방울토마토의 탱글한 식감과 모차렐라의 부드러움, 그 위에 뿌려진 바질 잎의 향긋함이 조화를 이루었다.
색감이 아름답고 향이 풍부한 로컬 맥주, 그리고 글라스로 주문한 로컬 레드와인은 양고기와 환상의 조합을 이루었다. 움브리아 지역에서 생산된 산지오베제 품종의 와인은 타닌이 적당하면서도 과일 향이 풍부해, 기름진 고기 요리와 완벽하게 어울렸다.
음식과 술, 그리고 분위기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비록 네 명만의 저녁 식사였지만 깊은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즐긴 이 저녁 식사는 아시시에서의 첫날을 장식하는 잊지 못할 순간이 되었다. 식당 주인이 직접 나와 "부온 아페티토(Buon appetito, 맛있게 드세요)"라고 인사하며 건넨 미소에서, 이곳이 단순히 장사를 위한 곳이 아니라 진심으로 손님을 대접하는 공간임을 느낄 수 있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나머지 일행 네 명이 20분 후 도착한다는 문자가 왔다. 서둘러 식사를 마무리하고 처음 내렸던 장소로 향했다. 잠시 여유가 있어 프란체스코 광장의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고요한 밤공기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중세 건물들의 실루엣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광장 한쪽에서는 몇몇 순례자들이 조용히 앉아 묵상에 잠겨 있었고, 멀리 성당의 종탑이 별빛 아래 고즈넉하게 서 있었다.
약속 장소로 이동해 기다리니, 예상보다 빠르게 일행이 도착했다. 초행길에 야간 운전까지 더해졌지만, 걱정했던 것보다 순조롭게 도착할 수 있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오는 도중 예상치 못한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한다. 경찰에게 범칙금 60유로를 물었다는 것이다. 이유인즉슨 렌터카의 헤드라이트를 상향등으로 켜서 달렸고, 이를 불편하게 여긴 다른 차량 운전자가 경찰에 신고했기 때문이었다.
상향등을 켜는 것이 불법인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모든 지역에서 금지된 것은 아니고 특정 지역에서만 제한된다고 한다. 문제는 운전 중 이런 제한사항을 주의 깊게 확인해야 하는데, 영어 안내조차 병기되지 않은 경우가 많아 외국인 운전자가 벌금을 피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일행이 선처를 요청했지만, 아마도 요즘 지자체의 재정난 때문인지 경찰은 단호했다. 심지어 카드리더기까지 가져와 범칙금을 즉시 부과했다고 한다. 마치 음식점에서 계산하듯 신속하고 기계적으로 말이다.
어찌 보면 법규 위반에 대한 당연한 조치였지만, 그래도 일행 모두가 무사히 도착해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하게 느껴졌다. 60유로는 아쉽지만, 그 정도는 여행의 일부로 생각하기로 했다.
후발대의 체크인을 도운 뒤, 각자 잠시 휴식을 취하고 30분 후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나중에 도착한 일행 중 한 커플의 방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캐리어 두 개 중 하나의 비밀번호를 정확히 입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그 캐리어에는 부인의 모든 물건이 들어 있어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었다.
몇 가지 조합을 시도해 보았지만 결국 허사였다. 다른 일행들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함께 고민했다. 만약 끝내 열리지 않는다면? 최악의 경우 캐리어를 부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앞으로 남은 여정 동안 짐을 어떻게 보관해야 할지도 문제였다. 다들 긴 여정에 피곤한 상태였기에 일단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아침 8시에 식당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후 헤어졌지만, 모두의 마음 한편에는 캐리어 걱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한 커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해결되지 않는다면 여행 일정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 아침에 프런트에 부탁해서 도구를 빌려야 하나, 아니면 근처에 자물쇠 수리점이라도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밤사이에 기적처럼 해결되기를 바라며, 우리는 각자의 잠자리에 들었다. 창문을 열어두니 아시시의 밤공기가 차갑게 흘러들어왔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골목 어딘가에서 늦은 귀가를 하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내일은 어떤 하루가 펼쳐질까?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아시시에서의 첫날밤이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