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체스코의 가르침이 살아 숨 쉬는 곳
이틀 전 이탈리아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시차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다. 원래 새벽잠이 없는 편이라 5시 반쯤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간단히 옷을 챙겨 입고 혼자 조용히 호텔을 빠져나와 프란체스코 성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가 떠오르기까지는 약 1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희미하게 동이 트고 있었지만, 새벽의 상큼한 공기와 함께 성당 아래 광장을 밝히는 가로등의 불빛이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아무도 없는 광장의 고요함은 프란체스코 성당 아래라는 장소성과 어우러져 나를 한없는 평화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듯했다.
10분쯤 그렇게 분위기에 취해 있는데, 작은 트럭이 광장으로 들어와 모퉁이에 정차하더니 물건을 내리기 시작했다. 아시시의 하루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곧 성당 앞 광장으로 통하는 계단을 밟으며 올라섰다. 어젯밤 야경을 잠시 감상하긴 했지만, 새벽의 고즈넉한 분위기 속 성당과 주변 풍경은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저 멀리 서서히 동이 트고 있음을 실감하며, 몇 장의 사진으로 그 순간을 담아 두었다.
그리고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어차피 이번 여행에서는 시간의 제약으로 아시시의 절반도 다 돌아보지 못할 것이기에, 이 새벽 산책은 사전답사의 의미도 담고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일행들에게도 제한된 시간 안에 조금이라도 더 좋은 추억을 남겨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마을 위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전망대로 이어진 계단길이 나타났다. 하지만 정상까지 가기에는 시간적으로 무리가 있을 것 같아 전망대는 포기했다. 대신 아시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적당히 높은 곳을 찾아 조금 더 걸어 보기로 했다.
20분쯤 걷다 보니, 마침 동트기 직전이었다. 저 아래 펼쳐진 마을과 맞닿은 먼 산 위가 붉게 물들며 서서히 밝아 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산 사이로 눈부신 태양이 떠오르자, 나는 아침 햇살을 온몸으로 느끼며 감동에 젖었다. 이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춘 듯했다.
이제 7시를 조금 넘긴 시간. 아시시의 하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가게들이 영업 준비를 하고 소형 트럭들이 물건을 배달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 관계상 미네르바 성당이 있는 코뮤네 광장(Piazza del Comune)을 마지막으로 둘러본 뒤, 서둘러 호텔로 돌아갔다.
마을을 약 한 시간 반 정도 돌아다니며 찍었던 사진을 단체방에 올리고 싶었지만, 간밤에 캐리어 비밀번호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몰라 망설였다. 그때 누군가 식사 시간을 확인하는 메시지를 올렸고, 이에 대한 댓글을 캐리어 주인이 남겼다. 아마도 문제가 해결된 것 같았다. 기대감을 안고 호텔 방에 돌아가 간단히 씻은 후, 아내와 함께 호텔 식당으로 내려갔다.
일행 중 캐리어 주인 부부도 있었는데, 얼굴 표정만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번호를 찾느라 애를 먹다가 결국 새벽 3시쯤 알아냈다고 한다. 어찌 보면 다행스러운 해프닝이었다. 최근에 비밀번호를 바꾸면서 기존 번호와 새 번호를 헷갈려 기억하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 잘못 기억한 숫자들을 중심으로 여러 조합을 시도하다가 우연히 맞춘 것이었다.
우리는 간밤의 소동이 무사히 해결된 것을 무척 다행스럽게 여겼다. 살다 보면 정말 많은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기억해야 한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수많은 로그인 정보를 어딘가에 저장해 두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된다. 이 문제를 직관적이면서도 안전하게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일행들은 안도감과 함께 살짝 들뜬 기분이었고, 호텔 식당의 세련된 분위기와 쾌적함 덕분에 더욱 만족스러운 아침 식사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과일, 다양한 종류의 빵과 잼, 달걀 요리, 맛있는 커피까지 아침 식사로서 충분한 구성을 갖추었고, 하나같이 정갈하고 맛도 좋았다. 무엇보다 우리가 거의 독방처럼 사용한 공간은 통유리창을 통해 호텔 입구를 내려다볼 수 있어 개방감도 뛰어나 더욱 만족스러웠다.
성 프란체스코의 가르침이 살아 숨 쉬는 곳
아침 식사를 끝내고 체크아웃을 위해 캐리어를 꾸려 호텔 로비에 맡겨 놓고, 본격적으로 프란체스코 대성당과 아시시 마을을 구경하러 나섰다. 프란체스코 대성당 아래 광장에서 단체 사진을 찍은 후, 드디어 상부 성당으로 올라갔다. 마침 일요일 미사가 진행 중이라 성당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물론, 안쪽까지 다가가 조토의 프레스코화를 온전히 감상할 수 없어 아쉬움이 컸다. 그러던 중, 다음 미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약 10분간의 짧은 공백이 생겼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입장했다. 앞쪽으로 이동하며 프레스코화를 비록 서둘러 보아야 했지만, 거의 다 감상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가톨릭 신자라면 이곳에서 미사에 직접 참석하는 것이야말로 여행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이 될 것이다.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프란체스코 대성당은 '작은 형제회'로 불리는 프란체스코회의 모교회이자 로마 가톨릭의 주요 순례지 중 하나다. 프란체스코 성인이 태어나고 활동한 아시시에서 성인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모여들자 '작은 형제회'라는 수도회를 세웠다. 이 수도회가 바로 프란체스코 수도회인데, 비슷한 시기에 등장하는 도미니크 수도회와 함께 스스로 노동하며 최소한의 탁발로 연명했기 때문에 흔히 탁발수도회라고 부른다.
문득 서울 정동길 초입에 있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건물이 떠올랐다. 평소에 무심코 지나치던 그 건물과 관련이 있는 아시시 프란체스코 성당 앞에 내가 서 있다니, 묘한 감회가 들었다. 참고로 '프란체스코'는 '프랑스인'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1228년에 공사를 시작한 성당 지하에는 프란체스코 성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상부 성당과 하부 성당으로 구성된 이 성당은 후기 중세 화가들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여기에 참여한 대표적인 화가가 치마부에와 그의 제자인 조토다.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를 28개의 연작으로 묘사한 조토의 프레스코화는 이탈리아 최고의 프레스코화로 손꼽힌다.
'프레스코(fresco)'란 이탈리아어로 '신선하다'는 뜻이다. 벽에 석회 반죽을 얇게 바른 다음, 반죽이 마르기 전 신선한 상태에서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리면 석회 반죽 자체가 마르면서 안료가 착색되기 때문에 색이 오래 잘 보존된다. 미술사학자들 사이에는 '견오백 지천년(絹五百 紙千年)'이라는 말이 있다. 비단 그림은 500년, 종이 그림은 1,000년 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프레스코화는 잘만 다루면 종이보다 더 오래간다는 것이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천지창조〉를 그리던 미켈란젤로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랜 시간 동안 비계 위에서 머리를 뒤로 젖히고 몸을 활처럼 구부린 채 4년 동안 그림을 그린 그는 건강이 악화되고 직업병까지 생겼다. 척추는 휘었고, 떨어지는 회반죽과 안료로 인해 시력까지 잃을 뻔했다. 그런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위대한 예술작품을 창조해 낸 예술가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나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날씨도 우리를 반기듯 기온이 적당하고 하늘도 맑아 상쾌한 기분으로 아시시를 즐기기에는 최적의 상태였다. 나는 아침에 돌았던 코스를 단축해 미네르바 성당까지 갔다가 돌아올 계획이었다. 미네르바 교회는 원래 기원전 30년에 건축되었다. 이후 발견된 봉헌 현판을 근거로 헤라클레스에게 헌정된 신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신전에서 발견된 여성 조각상을 보고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에게 헌정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 미네르바 성당의 코린트식 기둥은 지금도 여전히 우아한 외관을 유지하고 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비율의 놀라운 조화와 건축적 디테일의 세련된 아름다움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로마나 그리스의 고대 도시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생활에 대한 권태와 예술적 탐구를 위해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던 괴테가 이 건축물을 감상하는 것을 좋아했다는 일화도 있다. 미네르바 성당은 종교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도시의 수백 년 된 역사를 증언하는 중요한 역사적 기념물이기도 하다. 로마 시대는 물론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발전을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하니 더욱 의미가 있어 보인다.
아시시의 골목길은 구석구석 옛 시간의 흔적이 쌓여 있어 운치가 넘쳤다. 마을 골목을 거닐며 아시시의 정취를 즐기고, 예쁜 가게들도 기웃거리다가 젤라토 가게에 들렀다. 아시시의 젤라토는 어떤 맛일까 궁금했다. 역시 이탈리아의 젤라토는 어디를 가나 일품이었다. 다소 비싸기는 하지만, 종류가 다양하고 색감도 예쁘고 퀄리티도 뛰어났다. 그중에서도 우리 멤버들이 가장 선호한 맛은 레몬과 피스타치오였다.
아시시를 떠나기 전, 점심 식사를 하러 예약해 둔 식당(Le Terrazze di Properzio)으로 향했다. 사실 미리 점찍어 둔 맛집이기는 했지만, 막상 여기 올 때까지 예약은 하지 않았다. 마침 어제 체크인을 도와준 호텔 매니저에게 식당 얘기를 꺼냈더니 자기가 식당 주인과 잘 아는 사이라며 고맙게도 바로 전화를 걸어 예약해 주었다.
어젯밤 산책하면서 식당 위치도 확인할 겸 직접 찾아가 식당 주인에게 인사하고 예약 상황도 확인했다. 구글 지도에서 사진으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외관이 훌륭했다. 식당 주인에게 "내일 점심 예약을 했는데 제일 좋은 자리를 부탁드린다"라고 했더니, 그는 "걱정 말라"며 예약 전화를 받자마자 식당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준비해 두었다고 했다.
식당 오픈 시간이 12시로 되어 있어서 5분 전쯤 도착해 기다렸는데, 식당 앞 유리문에는 12시 15분 오픈이라고 적혀 있었다. 역시 구글이 제공하는 정보를 100% 신뢰할 수 없는 법이다. 문득 6년 전 혼자 뉴질랜드 남섬을 여행하던 때가 떠올랐다. 퀸스타운 숙소에서 전망대까지 걸어서 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고 구글이 알려줘서, 곤돌라를 타지 않고 산책 삼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구글은 평지 기준으로 거리와 시간을 산정했던 것 같았다. 산길도 제법 경사가 있었지만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가 섞여 있는 길을 따라가다 보니 1시간도 넘게 걸렸다. 결국 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구글을 원망했던 기억이 난다.
잠시 옛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어느새 다른 예약 손님들도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식당 앞에 10여 명이 줄을 서자, 지나가던 관광객들까지 무슨 일이 있냐며 궁금해할 정도였다. 이윽고 식당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 어제 미리 살펴보았던 예약석으로 안내받았다. 어제는 대략적인 위치만 확인했을 뿐이고, 밤이라 제대로 느끼지 못했는데, 세상에 정말 끝내주는 전망이었다. "아시시 전체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식당"이라는 소개글이 과장이 아니었다. 그것도 이 식당에서 단연 최고의 자리였다. 다들 환호했다.
주변에는 포도밭과 올리브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평화롭고 목가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저 멀리 움브리아 평야와 산맥이 한눈에 들어오는 개방감이 가슴을 탁 트이게 만들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음식을 주문했다. 애피타이저로는 칼라마리, 아티초크 튀김, 카프레제 샐러드를 선택했고, 메인 요리는 파스타, 피자,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물론 와인과 음료도 곁들였다.
음식도 기대 이상으로 수준급이었다. 무엇보다도 이곳의 전망이 기본 점수를 한껏 끌어올려 음식 맛도 최고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고즈넉한 슬로시티의 한적한 식당에서, 우리만의 공간을 즐기며, 마음껏 웃고, 마시고 먹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이 순간이야말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임을 확신했다.
움브리아의 햇살 아래, 성 프란체스코의 가르침이 살아 숨 쉬는 아시시에서 우리는 진정한 여행의 의미를 발견했다. 그것은 단순히 명소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공기와 빛, 그리고 함께한 사람들과의 교감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