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탈치노 와이너리, 와인과 웃음이 가득한 하루

by 트릴로그 trilogue

별이 쏟아지는 밤


오늘도 아직 시차 적응이 덜 됐는지, 새벽 4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눈이 떠졌다. 토스카나 농가주택에서 맞이한 첫밤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다른 일행들은 방의 컨디션에 만족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옷을 챙겨 입고 조용히 방을 나서 앞마당으로 나갔다. 가로등이 없는 어두운 곳으로 이동하여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마치 별들의 축제가 벌어진 듯한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북두칠성, 오리온자리, 그리고 카시오페아 자리. 익숙한 몇 개의 별자리들을 하나둘 찾아가며 한동안 밤하늘을 감상했다. 문득 2024년 2월 초, 다른 부부 네 커플과 함께 뉴질랜드 남섬을 여행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행 첫날, 테카포 호숫가(Lake Tekapo)에서의 별자리 관측 투어를 했던 순간이 특히 선명했다. 배율이 뛰어난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들여다보니, 그 화려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북반구에서는 볼 수 없는 남십자성이었다.



그때의 감동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북반구 청정지역에서의 별자리 관측은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한참 동안 별을 감상하다 보니 다시 졸음이 밀려오고, 차가운 새벽 공기가 느껴져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농가의 아침 식탁


숙소 주인에게 미리 부탁해 8시 반에 뒷마당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8명이 숙소 마당에 모여, 농가에서 마련한 소박하지만 빠짐없이 갖춰진 식단으로 아침을 즐겼다. 저 멀리 보이는 피엔차 마을을 바라보며 어제의 기억을 나누고, 커피 리필까지 부탁하며, 여유롭게 담소를 나눴다. 중간에 주인에게 단체 사진도 부탁하며 웃음꽃을 피우기도 했다. 한 시간 남짓, 여유로운 아침 식사의 기쁨을 만끽했다.



글래디에이터의 흔적


숙소 근처에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가 고향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만나려 했던 마지막 장면의 배경이 된 장소(Foto de Il Gladiatore)가 있었다. 우리는 먼저 그곳을 들러본 뒤, 예약해 둔 와인 테이스팅 장소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구글 지도를 따라가다 보니 마을 진입로에 ZTL 간판이 붙어 있어 당황했다. 결국 길가에 차를 주차한 뒤 걸어서 찾아갔지만, 확신이 서지 않아 급히 사진 한두 장만 찍고 서둘러 되돌아 나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제대로 찾아가긴 했던 모양이었다.


다음 행선지는 포지오 코빌리 농가(Agriturismo Poggio Covili)였다. 농가 진입로를 따라 길게 늘어선 사이프러스 길이 압권이었다. 이곳은 토스카나에서 가장 길고 완벽한 일직선의 사이프러스 나무길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도착해 보니 이미 네 팀 정도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우리도 서로 사진을 찍어 주다가, 다른 외국 관광객에게 단체사진도 부탁해 추억을 만들었다. 사진을 다 찍고 나서 아무 생각 없이 돌아서는 순간, 그들이 "우리 사진도 찍어 줘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웃으며 말했다. 순간 '어글리 코리안'이 된 것 같아 쑥스러웠다.



와이너리에서의 와인과 올리브오일과의 만남


오전 11시에 와인 테이스팅을 예약한 와이너리(Ciacci Piccolomini D'Aragona)로 서둘러 이동했다. 원래 30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굽이굽이 이어진 산길이 거의 정상 부근까지 이어지면서 시간이 지체되었다. 제법 큰 마을인 로카 도르차(Rocca d'Orcia)를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이곳은 최근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달콤한 이곳 La Dolce Villa〉의 촬영지이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중세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압도적인 전망을 담당했던 곳이다. 시간이 빠듯하여 그냥 스쳐 지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예상보다 15분 정도 늦어져 이러다가 와인 테이스팅은 물 건너가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뛰어서 와인숍으로 돌진했다. 다급하게 사정을 설명하며 양해를 구한 끝에 간신히 테이스팅을 할 수 있었다.


와인 테이스팅 비용은 일 인당 15유로로 비교적 저렴했는데, 대신 이 와이너리의 시그니처격인 최상급 와인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도 3가지 와인과 올리브오일 등 모두 4가지 시음 기회를 가졌다. 테이스팅을 도와주는 분의 설명을 귀 기울여 들으며 세 가지 와인을 시음했다. 대체로 최근 빈티지라 그런지 젊고 힘 좋은 인상을 주는 와인이었다. 처음에는 와인이 충분히 열리지 않아 다소 아쉬웠지만, 시간이 지나자 향이 살아나며 점점 매력을 드러냈다. 덕분에 이 와이너리의 탄탄한 양조 실력과 깊은 내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와인도 훌륭했지만, 빵과 함께 경험한 올리브오일이 특히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산도도 낮고 풍미가 강렬했다. 일행 모두가 올리브오일을 너무 좋아했다. 와이너리에서 올리브 농장도 겸한다는 사실은 최근에야 알았는데, 꽤 흥미로웠다. 실제 와이너리 전체 부지의 20~30%를 올리브나무 재배에 할애하는 경우도 제법 많다고 한다.



와인과 올리브오일이 모두 마음에 들어, 결국 한 커플마다 수준급 와인인 BDM 한 병과 올리브오일 두 병을 세트로 구매했다. 올리브오일을 여러 병 구매하니 10% 할인을 받을 수 있어 기쁨이 배가되었다. 캐리어 무게 제한 때문에 더 사지 못한 것이 아쉬웠고, 나중에는 올리브오일을 조금 더 사 가지고 올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4개월쯤 지나니 사 가지고 온 올리브오일 두 병도 다 떨어졌다. 이 시점에 와이너리 온라인숍에 이메일을 보내 추가로 몇 병 주문하려고 알아보았다. 그러나 운송비, 통관 절차, 관세 등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결국, 배송대행업체를 활용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탈리아에 있는 배송대행업체의 주소(배대지)로 보낸 후 한국으로 배송하는 방식으로 총 5병을 주문했다. 주문한 지 2주 만에 도착한 올리브오일의 가격은 배송비 포함 500ml 한 병에 4만 원 정도였다. 올리브오일의 산도, 신선도, 풍미 등 품질과 여행의 추억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치 있는 선택이었다.




몬탈치노, 와인의 성지


와이너리에서의 인상적인 경험을 뒤로하고, 몬탈치노로 향했다. 몬탈치노는 토스카나 중심부의 작은 언덕 위에 자리한 마을로, 중세 분위기가 가득한 아름다운 풍경 덕분에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토스카나의 자부심을 단 한 단어로 압축한다면 그것은 몬탈치노일 것이다. 거친 대지에서 뿌리내린 포도가 수년을 어두운 오크통 속에서 견디며 비로소 '브루넬로'라는 이름을 얻듯, 이 마을 역시 견고한 성벽 안에서 수백 년의 세월을 묵묵히 익혀왔다. 토스카나 와인의 본산인 몬탈치노.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DM/Brunello di Montalcino)는 바롤로, 아마로네와 함께 이탈리아의 3대 와인으로 꼽히는 최고급 레드 와인이다.


몬탈치노에서 재배된 산지오베제 품종은 약간의 갈색빛(Brune)이 돈다 하여 과거에는 '브루넬로'라고 불리기도 했다. 오래된 포도나무의 포도를 사용하기 때문에 산미가 높고 타닌이 강해 긴 숙성 기간이 필요하다. 숙성을 거치며 과실 향이 잘 살아나고 색이 더욱 깊어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긴 숙성과 오랜 생명력은 물론,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는 와인의 중심지, 몬탈치노. 그곳에 직접 서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멀리서 몬탈치노 요새의 위용이 눈에 들어오고, 마을에 도착해 공영주차장에서 4시간 주차비를 결제한 후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마을 곳곳에 자리한 와인숍과 식당들은 이곳이 와인의 성지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현지 와인의 가격은 예상보다 높았다. 일부 와인 애호가들은 "와인 가격이 사악하다"라는 표현까지 쓸 정도였고, 실제로 여러 숍에 들러보며 가격을 확인해 보니 선뜻 구매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수준이었다. 결국 와인 가격 비교만 하고 구매는 포기했다. 이미 와이너리에서 꽤 괜찮은 BDM 와인을 샀고, 더군다나 피렌체 가는 길에 들를 안티노리에서 티냐넬로를 살 계획이었기 때문에 쉽게 마음을 접을 수 있었다.



빕 구르망에서의 점심


몬탈치노의 식당들은 예약 없이는 자리 잡기가 어려웠다. 예약 없이 찾은 일 모로(Il Moro)는 이미 만석이었고, 대기 손님도 많아서 결국 발길을 돌려야 했다. 재빠르게 대안을 찾다가 미쉐린 빕 구르망 식당(Taverna del Grappolo Blu)을 발견했다. 급히 검색해 보니 수준급 식당으로 기대할 만한 곳이었다. 운 좋게도 조금 전 비어 있던 8인석을 배정받아 식사할 수 있었다.



미쉐린 빕 구르망(Bib Gourmand)은 합리적인 가격(1인분 평균 5만 원 이하)과 훌륭한 맛을 두루 갖춘 식당에 부여하는 등급이다. 쉽게 말해 가성비 좋은 맛집이라는 의미다.


이곳의 음식 맛은 '빕 구르망'으로 선정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일반적으로 식당을 이용할 때, 8명은 다소 많은 편이고, 4명 정도가 가장 이상적인 인원 같다. 보통 한 테이블에 4명이 앉는 경우가 많고, 8명이 앉을 두 테이블이 동시에 비어 있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8명이 함께 식사할 때의 가장 큰 장점은 메뉴 선택의 다양성이다. 여러 가지 음식을 주문해 나눠 먹으며 더욱 풍부한 미식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몬탈치노는 규모가 크지 않은 마을이라 둘러보는 데 서너 시간이면 족했다.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 탁 트인 전경과 성곽, 그리고 고풍스러운 중세의 건축물을 감상할 수 있었다. 몬탈치노는 단순히 풍경을 감상하는 곳이 아니라, 기다림 끝에 찾아오는 절정의 미학을 오감으로 증명하는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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