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순례, 막시무스의 집을 찾아서
피엔차의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8명 중 '막시무스의 집'을 보러 가겠다고 나선 사람은 우리 부부와 김 변호사, 단 3명뿐이었다. 인원은 적었지만 설레는 마음만은 가득했다. 숙소에서 불과 차로 5분 거리,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이었다.
도착해 보니 주변은 고요했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듯한 캠핑카 한 대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차를 세우고 저 멀리 보이는 '막시무스의 집'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약 10분 정도 걷자 'ZTL 경고'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30분만 더 가면 목적지에 닿을 것 같았다.
그때 뜻밖의 발견이 있었다. 바로 근처에 아그리투리스모 일 카살리노(Agriturismo Il Casalino)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곳이었다. '막시무스의 집'이 바로 지척에 있고, 한층 더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이곳에 묵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스쳤다.
넓게 펼쳐진 시골길은 육안으로는 가깝게 느껴지지만, 막상 걸어보면 예상보다 훨씬 멀다. 10분이면 갈 것 같은 거리도 20~30분은 족히 걸린다. 7시 반쯤 되자 저 멀리 산 너머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우리가 찾던 '막시무스의 집' 근처에 도착했다.
그러나 우리가 기대했던 영화 속 바로 그 장면은 이곳이 아니었다. 물론 우리 앞에 서 있는 집이 막시무스의 집으로 등장한 건 맞지만, 어제 길을 잘못 들어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언덕길 초입에서 영화는 촬영되었던 것이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막시무스의 집'을 마음에 담고 서둘러 주차한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꼭두새벽부터 한 시간 넘게 시골길을 걸으며 토스카나의 속살을 잠시 엿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계획에 없었던 발도르차 평원을 두 발로 온전히 느껴본 것이 오히려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피엔차에서의 마지막 아침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마친 후 체크아웃 준비를 대충 해놓고, 어제와 같은 시간에 뒷마당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아침 산책을 다녀온 우리는 자랑스레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일행들이 부러워해 주기를 기대했지만, 정작 그들은 달콤한 휴식이 더 좋았던 듯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아 조금 민망했다.
일행들의 반응에 살짝 민감해진 나는 조심스레 아그리투리스모에서의 경험이 어땠는지 물어보았다. 다행히도 모두가 한 목소리로 좋았다고 말해 안도할 수 있었다. 사실 나 역시 아그리투리스모도, 토스카나도 처음이었기에 완벽하게 준비하기란 애초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만의 여행처럼 철저하고 꼼꼼하게 준비한 덕분에 큰 문제없이 여행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가벼운 해프닝 정도를 제외하면 우려할 만한 돌발 상황도 없었고, 식당과 숙소에 대해서도 모두가 만족해하는 분위기였다.
예상치 못한 발견, 진짜 '그 집'
피엔차를 출발해 시에나로 향하던 중,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연히 지나가던 길가에서 영화 속 바로 그 장면의 집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새벽에 찾아갔던 집이 아니라,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마지막 장면에 정면으로 나왔던 바로 그 집 (Genna Borborini Maria Eva)이었다!
지금은 농가주텍으로 이용되는 사유지라서 길 가에 있는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서둘러 차를 세우고 일행 모두 내려 사진을 찍었다. 새벽에 한 시간 넘게 걸어서 찾아갔던 곳에서는 보지 못했던 바로 그 장면을, 이렇게 우연히 마주하게 되다니. 어쩌면 이것이 토스카나가 우리에게 선사한 진짜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써 찾으려 할 때는 만나지 못했지만, 기대하지 않았을 때 나타난 그 집은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토스카나의 신비로운 선물, 크레타 세네시
진짜 '막시무스의 집'에서의 감동적인 만남을 뒤로하고, 우리는 유명한 포토 스폿인 크레타 세네시(Crete Senesi)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역시나 사진 명소답게 20~30명의 사람들이 저마다 멋진 포즈를 취하며 인생사진을 남기려고 분주했다.
이곳은 완만한 구릉, 사이프러스 나무들, 흰 점토로 덮인 언덕이 어우러진 전형적인 토스카나의 농촌 풍경을 품고 있다. S자 형태의 커브길 양쪽으로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이 길은 토스카나를 대표하는 사진의 단골 배경이다. 최고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시기는 아니었지만, 이곳의 경치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특히 이른 아침 짙은 안갯속에 휩싸인 신비로운 모습이나 일몰의 황홀한 풍경은 더욱 특별할 것 같아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토스카나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곳이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주차장이 따로 없어 길가에 차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뜻밖의 행복한 순간
사진도 꽤 많이 찍었으니 이제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눈에 아름다운 광경을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물끄러미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데, 근처에 있던 외국인 젊은 커플이 다가오더니 동영상과 사진을 찍어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묻지는 않았지만, 왠지 슬로베니아 사람들 같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갑작스러운 요청이었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그런데 막 동영상을 찍으려고 하는 순간, 남자가 여자 앞에 무릎을 꿇더니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프러포즈의 순간이었다. 아마도 이곳이 둘만의 특별한 순간을 남기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들의 소중한 순간을 제대로 담아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더 좋은 구도를 찾으려 몸을 움직이며 열심히 촬영했다. 여행 중에 뜻밖의 흐뭇한 장면을 함께할 수 있어 마음이 따뜻해졌다. 토스카나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펼쳐진 이 행복한 순간은, 우리에게도 특별한 선물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