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고요한 중세, 시에나에서 찾은 평화

by 트릴로그 trilogue

시에나에 들어서자 ZTL에 대한 걱정이 다시금 떠올랐다. 이곳은 15세기까지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로 번성했으며, 십자군 원정의 통과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이웃 도시인 피렌체와의 경쟁에서 밀려 쇠락하였는데, 오히려 덕분에 중세 도시의 모습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미리 예약해 둔 호텔(Villa del Sole Siena)에 찾아가는 방법을 문의해 둔 덕분에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가는 골목길에서 경찰차를 마주치자 괜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내비게이션을 따라 운전하여 호텔 건물 옆에 주차하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세련된 스타일의 중년 남성이 뛰어나와 우리 차 2대를 호텔 안쪽 좁은 마당에 능숙하게 주차해 주었다.

결국, 주차대행비용으로 한 대당 35유로를 지불했다. 다소 비싸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시에나 중심부까지 도보로 5분 거리라는 점, 그리고 ZTL 걱정 없이 안전하게 주차할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결코 아깝지 않은 비용이었다.



날씨마저 완벽했던 시에나. 체크인을 마친 후, 본격적으로 시내 구경을 나서기 전에, 호텔 마당에서 한동안 멋진 풍경을 감상하며, 다들 멋진 사진들을 찍었다. 호텔은 비용 대비 훌륭한 위치는 물론,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까지 갖추고 있어 모두 만족했다. 특히 호텔에서 캄포광장까지는 걸어서 단 5분 거리라는 점이 좋았다. 마침내 도착한 캄포광장. 고동 껍데기 모양의 부채꼴 광장이 우뚝 솟은 만지아의 탑과 함께 서 있는 푸블리코 궁전 앞에 펼쳐져 있었다. 유서 깊은 이곳의 분위기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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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포 광장에서는 팔리오(Palio)라고 불리는 말 경주 대회가 열린다. 여러 지역에서 열리는 팔리오 중에 시에나의 수호성인인 성모 마리아의 영광을 기리는 팔리오가 가장 유명하다.

해마다 7월 2일과 8월 16일, 캄포 광장에서 두 차례 열리는 전통 경마경기인 팔리오축제에는 많은 엄청난 관중들이 모인다. 캄포 광장의 둘레는 모래로 채워지고, 시에나의 17개 자치구를 대표하는 기수들이 안장 없는 말을 타고 캄포광장을 세 바퀴 도는 박진감 넘치는 경주가 펼쳐진다. 이 장면은 TV중계를 통해서도 몇 차례 본 적이 있다.

원래 ‘팔리오’라는 단어는 우승자에게 수여하는 ‘깃발’을 의미하는데, 이는 원래 자줏빛 비단 망토를 가리키는 라틴어 팔리움(Pallium)에서 유래했다. 중세 시대에는 황제나 영주들이 신하들에게 권한을 넘겨줄 때 망토를 양도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 관습이 축제로 변형되며 우승 자치구에 승리의 영광을 상징하는 깃발을 포상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그렇게 ‘팔리오’라는 이름이 축제의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대회 기간이 아니어서 경기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고자 팔리오 경기 사진이 있는 마그네틱을 기념품으로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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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포 광장 바닥에 담요를 깔고 누워 멍하니 시간을 보내거나 책을 읽어 보고 싶다는 아내의 작은 소망을 실현해 본 날이기도 했다. 광장에는 적당한 수의 관광객들이 있어 비교적 쾌적한 분위기였다. 어느덧 출출해질 무렵, 배꼽시계가 점심시간이 되었음을 알리기에 서둘러 근처 식당을 찾았다. 원래 예약했던 식당은 풀코스로 시켜야 하는 부담도 있었고, 중심부에서 약간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메뉴의 차별성도 없어 보여 취소했다. 이제 현장에서 적당한 식당을 찾아야 했다.


근데 광장 주변을 둘러보니 식당과 카페들이 제법 눈에 띄었고, 마침 우리가 사진을 찍던 곳에서 근처에 ‘일 캄포 Il Campo’라는 레스토랑이 있었다. 광장 주변에 있는 식당들은 위치가 좋지만, 음식 맛이 기대에 못 미칠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걱정을 뒤로하고, 8명이 함께 앉을 수 있는 야외 좌석에 자리 잡았다. 만지아탑, 푸블리코궁전, 그리고 캄포광장이 한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면서 식사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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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와 파스타를 맥주와 함께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기 전에 식전빵을 올리브오일과 발사믹식초에 찍어 가볍게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담당 종업원이 올리브튀김과 깔라마리를 가져다주었고, 우리는 순간 이것도 식전빵처럼 무료로 제공되는 것인가 하는 엉뚱한 착각을 했다.


음식을 조금 먹고 있던 중, 알고 보니 그것은 다른 테이블에서 주문한 요리였고, 종업원의 실수로 우리에게 잘못 제공된 것이었다. 주문하지 않은 음식을 별다른 확인 없이 받으면서도, 서비스거나 기본 제공 메뉴로 착각했던 우리에게도 책임이 없지는 않았다. 괜히 음식을 가져다준 종업원이 난처한 상황에 처할까 염려되어 비용을 지불하려 했지만, 매니저가 직접 와서 “저희 실수니까 그러지 않아도 된다”며 극구 사양했다. 이윽고 원래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다. 비록 최상의 맛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세계적인 관광지인 캄포광장에서 이 정도면 아주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역시 피자에는 맥주가 제격이었다. 페로니(Peroni) 생맥주와 함께한 캄포광장에서의 점심 식사도 그야말로 완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