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향기
호텔에서의 마지막 아침
시에나에서의 편안한 밤을 보내고,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식당에서 만나 깔끔하게 준비된 음식들을 커피와 함께 즐기면서 시에나의 소회를 나누었다. 특히 우리가 묵었던 이 호텔이 너무 마음에 들어, 만약 지인 중에 누가 시에나에 간다고 하면 이 호텔을 강력하게 추천해야겠다고 말했다.
인상적이었던 시에나를 뒤로하고 피렌체를 향해 출발했다. 여행 사전 모임 때까지는, 피렌체 가는 길에 우리나라의 정육식당과 비슷한 콘셉트로 유명한 스테이크 레스토랑(Officina della Bistecca)에 점심을 예약했었다. 하지만 피렌체에서도 피렌체식 스테이크인 '비스테카'를 즐길 계획이었기 때문에, 다른 메뉴 선택권 없이 오로지 양이 많은 스테이크를 레어 상태로 제대로 즐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생겼다.
거기다가 결정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안티노리(Antinori nel Chianti Classico) 와이너리를 잠시 경험해 보고, 부속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며 와인숍에서 와인도 구입할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결국 우리는 행선지를 바꾸게 되었고, 그 선택은 대만족, 대성공이었다.
안티노리, 700년 전통의 와이너리
시에나에서 안티노리 와이너리까지는 차로 약 40분이 걸렸다. 유튜브 영상을 통해 이미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의 모습은 어느 정도 접했지만, 실제로 마주한 와이너리는 상상과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공간이었다.
700년이 넘는 전통을 이어온 안티노리 가문은 대대로 와인업계에 종사하고 있으며, 와인업계의 거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끊임없는 혁신을 추구하는 이들은, 토스카나 지역을 기반으로 키안티 클라시코, 몬탈치노, 볼게리 등과 같은 최상품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안티노리 가문의 와인 생산 철학은 최고 품질을 추구하는 동시에 지역적 특성을 살리고, 우아함과 음식과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마시기 좋은 와인을 만드는 데 있다. 이곳에서 와인과 음식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안티노리는 접근성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10년에 걸쳐 완성되었다는 멋진 와이너리 건물과 포도밭이 마치 뮤지엄을 연상케 할 정도로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비록 와이너리 투어는 하지 않았지만, 와인 매장을 둘러보며 티냐넬로 2021년 빈티지 와인을 구입했다. 이 와인은 와인 전문지 《와인 스펙테이터》가 매년 선정하는 '100대 와인' 중에서 '2024년 TOP 3' 와인으로 선정된 명품 와인이다. 한 병만 사 가지고 온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한 병이라도 가져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기쁘게 느껴졌다.
검은 수탉의 전설
토스카나 키안티 지역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알아 두면 좋을 것 같다. 먼저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 병을 보면, 예외 없이 '검은 수탉(Gallo Nero)' 상징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검은 수탉은 왜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의 상징이 되었으며,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검은 수탉은 모든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 생산자에게 매우 중요한 상징이다. 이 로고는 와인 병의 목이나 라벨에 부착되며, 그것만으로도 키안티 클라시코 지역 내에서 정해진 엄격한 기준을 준수하며 생산된 정통 와인임을 보증한다. 검은 수탉 상징은 원래 피렌체 공화국 시절, 키안티 지역을 통제하던 군사기관의 표식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세 시대, 키안티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대립하던 피렌체와 시에나는 전쟁을 끝내고 국경을 정하기 위해 독특한 방식에 합의하게 된다.
각 공화국에서 한 명의 기사를 선발하여, 수탉이 울면 말을 타고 출발하게 하고, 두 기사가 만나는 지점을 국경으로 정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시에나 사람들은 새벽에 기사를 깨우기 위해 흰 수탉을 선택했고, 행사 전 며칠 동안 수탉에게 먹이를 충분히 주며 잘 보살폈다. 반면, 피렌체 사람들은 검은 수탉을 골라 어둡고 좁은 우리에 가둔 채 며칠 동안 굶겼다. 두 공화국 사람들은 말을 타고 달릴 기사보다 수탉에게 더욱 집중하고 온통 신경을 곤두세웠다.
결과적으로, 경주 당일 배가 몹시 고팠던 피렌체의 검은 수탉은 날이 밝기도 전에 악에 받친 듯 울어댔고, 이에 피렌체 기사는 재빨리 말을 타고 출발했다. 반면, 시에나의 흰 수탉은 충분히 먹고 편안한 상태였기 때문에 새벽이 한참 지나서야 여유롭게 울었다. 뒤늦게 출발한 시에나 기사는 불과 12km밖에 달리지 못해 폰테루톨리에서 피렌체 기사를 만나게 되었고, 결국 키안티 지역의 대부분은 피렌체 공화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역사 속 흥미로운 일화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키안티의 상징이 된 검은 수탉은 어떻게 와인 병에 붙게 되었을까? 1924년,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 생산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와인을 보호하고 원산지 표시를 명확히 하기 위해 협회를 설립했다. 이 과정에서 키안티 클라시코의 상징으로 검은 수탉이 채택되었으며, 이 그림은 르네상스 예술을 집대성한 피렌체의 유명 화가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선택했다고 한다.
이후 1932년, '클라시코(Classico)'라는 명칭이 추가되어 키안티 클라시코 지역에서 만들어진 와인과 일반 키안티 와인을 구별하는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검은 수탉 상징 또한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이 발전함에 따라 더욱 세련되고 웅장한 모습으로 변모하며, 와인 병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언제나 믿고 즐길 수 있는 가성비 좋은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 개인적으로도 가장 좋아하는 와인 산지다.
리누치오 1180, 전망과 맛의 완벽한 조화
드디어 예약한 시간이 되어 레스토랑(Rinuccio 1180)으로 들어갔다. 세련된 루프탑 레스토랑에는 올리브 나무 숲과 고대 교회가 어우러진 토스카나 언덕의 부드럽게 굽이치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넓은 파노라마 창문을 통해 숨 막히는 절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리누치오 1180'은 안티노리 가문의 선구자인 리누치오 안티노리를 기리기 위해 설계된 곳이다. 레스토랑 예약을 오픈 시간으로 해서 거의 선두권에서 입장할 수 있었고, 직원의 도움을 받아 음식을 주문했다. 레스토랑의 분위기와 인테리어도 모두 최상급이었기에 음식에 대한 기대감도 한층 높아졌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문득 8년 전, 옥타브 멤버 중 두 커플과 함께 떠났던 캐나다 로키 여행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 밴쿠버에서 밴프 국립공원으로 이동 중, 오카나간 호수 주변에서 가장 유명한 와이너리인 미션힐 에스테이트 와이너리(Mission Hill Family Estate Winery)에 들러 와인도 구입하고, 멋진 야외 레스토랑에서 잊지 못할 식사를 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작년 2월 뉴질랜드 남섬 여행 때, 센트럴 오타고 와이너리 밀집 지역 중에 가장 유명한 곳 중 하나인 킨로스(Kinross Winery, Cellar Door & Cottages)에서 식사했던 기억도 아직 생생하다. 아무튼 와인 산지로 유명한 곳을 여행할 때에는 그 지역의 매력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 반드시 그곳에서 숙박하거나, 와인 투어를 하거나 와인 테이스팅에 참여해 보는 것이 좋다. 아니면 적어도 와이너리 레스토랑에서 여유로운 식사를 즐기는 것도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나폴리 출신 직원의 유쾌한 서비스
먼저 제공된 식전빵이 굉장히 맛있었다. 이탈리아 식당의 식전빵은 대체로 맛이 좋았지만, 이곳의 빵은 단연 최고였다. 어느새 식전빵을 올리브오일과 발사믹 식초에 찍어 먹는 것이 익숙해져, 불과 며칠 사이에 일상이 되어 버린 듯했다. 우리를 자리까지 안내하며 메뉴 선택까지 도와준 직원은 인상도 좋았고 성격도 쾌활했다. 덩달아 우리의 기분도 한껏 고조되었다. 올리브오일이 부족해 더 달라고 했더니, "누가 마신 것 같다"며 장난스럽게 농담을 건넨 후, "나중에 계산할 때 올리브오일 값을 추가하겠다"며 능청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의 유쾌한 말투에 우리 일행도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스스로 나폴리 출신임을 밝히며 자연스럽게 유쾌한 대화를 이어 가던 그는, 남부 특유의 유머와 활기찬 기질이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에게 단체사진을 부탁했는데, 사진 실력은 다소 아쉬웠다. 외국인들은 주변 배경까지 아우르며 찍기보다는 인물을 중심으로 찍는 경향이 있어서인지 건물이나 배경이 일부 잘리거나 구도가 조금 어색했다. 그래도 바쁜 와중에 기꺼이 사진을 찍어준 그의 친절함이 고마웠다. 며칠 후 나폴리를 여행하며, 가끔 그를 떠올리며 미소 짓는 순간이 있었다.
와인은 안티노리의 와인 중에 적당한 품질과 가격대의 것으로 골랐는데, 일행의 반응이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이 와인은 앞에서 언급한 《와인 스펙테이터》가 재작년에 발표한 순위에서 2020 빈티지가 'TOP 7'에 랭크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은 와인이다. 검은 수탉 상징이 와인병에 붙어 있음은 당연했다. 이 와인은 지금까지 세 번인가 마신 기억이 있다. 오늘 마신 와인도 2020 빈티지였다. 집에 아직 한 병 남아 있는 2020 빈티지를 모임 때 함께 마시며 토스카나를 추억하기로 했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 손에 꼽을 만큼 감동적인 레스토랑이었다. 꼭 한번 방문할 것을 적극 추천한다. 인상적인 점심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피렌체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