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으로 가는 골목길
캄포광장에서 피맥까지 즐기며 배불리 식사를 마친 뒤, 주요 관광지인 시에나 두오모로 이어지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지금까지 거쳐 왔던 작은 마을급 도시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상점들의 분위기와 규모가 더 크고, 한층 세련되고 멋스러운 가게들이 길을 따라 줄지어 있었다.
그렇게 10여 분가량 골목길을 걸어가다 보니, 눈앞에 웅장한 시에나 대성당(Duomo di Siena)이 모습을 드러냈다. 골목 사이로 조금씩 보이던 대리석 줄무늬가 마침내 전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저절로 발걸음이 멈췄다.
시에나 대성당, 미완의 야심
시에나 대성당은 중세 고딕 건축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시에나의 자랑이자 역사적 유산이다. 13세기에 착공되어 오랜 세월에 걸쳐 완성되었으며, 화려하고 정교한 고딕 양식 속에 르네상스와 중세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작품들이 담겨 있다. 당초 시에나 대성당은 더욱 거대한 규모로 확장될 계획이었다. 현재의 성당을 단지 십자가 형태 건물의 익랑(transept)으로 만들고, 그 옆에 거대한 본당을 새로 건설하여 유럽 최대의 대성당으로 만들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그러나 1348년 흑사병이 시에나를 강타하면서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고, 결국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만약 이 계획이 완성되었다면, 시에나 대성당은 유럽에서 가장 웅장한 고딕 건축물 중 하나로 자리했을 것이다. 지금도 미완성된 확장 부분의 흔적이 '파차텔라(Facciatone)'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어, 당시의 야심 찬 계획을 짐작케 한다.
이 대성당은 피렌체와 경쟁했던 시에나의 과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당시 시에나 시민들은 대성당의 웅장한 외관과 화려한 장식을 통해 도시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고자 했다. 그 결과, 대성당의 파사드와 내부는 매우 정교하게 조각된 성경 이야기,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그리고 정밀한 조각들로 꾸며졌다. 특히 파사드 맨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여러 성인들의 조각상들은 다른 성당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웅장한 모습이었다. 그 장엄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외관은 흑백의 대리석 줄무늬 패턴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시에나의 전설적인 창시자인 레무스와 로물루스를 기른 암늑대의 흑백 색상을 상징한다고도 하고, 또 다른 해석으로는 성 요한 세례자의 상징적 색상을 반영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 흑백 대리석은 성당의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사용되어, 전체적으로 통일된 디자인을 이루며 시각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성당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규모와 화려한 장식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복잡하지만 정교한 문양과 교황의 일생을 묘사한 장면들로 장식된 돔형 천장을 올려다보며 감탄했지만, 세부적인 내용을 충분히 알지 못한 채 감상하다 보니 그 깊이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여행 전, 나는 특히 대리석 모자이크 바닥에 그려진 성경 이야기들을 조금 공부하고 왔는데도, 막상 그 앞에 서니 마치 밤샘 공부 후 시험장에서 문제지를 받아 든 순간처럼 머릿속이 하얘졌다. 많은 관광객들 사이에서 압도적인 장식들과 예술품들에 정신없이 시선을 빼앗기다 보니, 준비 부족이 여실히 드러난 듯했다. 약간은 흥분되어 당일치기한 실력이 드러난 셈이라고나 할까?
대성당 내부의 명소 중 하나인 피콜로미니 도서관은 피콜로미니 교황을 기리기 위해 그의 조카가 설립한 곳으로, 아름다운 프레스코화와 고서들로 가득 차 있었다. 피콜로미니 교황의 생애를 묘사한 핀투리치오의 프레스코화 10점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화려한 색채와 정교한 디테일이 대단했다.
골목에서 광장으로
성당을 나와 다시 골목길을 걸으며 시에나의 거리를 만끽했다. 도중에 마트(Siena Agricultural Consortium)에 들러 호텔에서 먹을 간식거리와 과일을 사면서 시에나의 특산품들을 구경했다. 골목을 따라 다시 광장 쪽으로 향해 내려오니, 파니니 가게(Panini Il Cencio)가 눈에 띄었다. 그곳에서 파니니와 음료를 사서, 캄포광장의 경사진 바닥에 앉아 간단한 저녁으로 요기를 했다. 핵심 관광지만 선별적으로 둘러보다 보니 아쉬움이 있기는 했지만, 점심과 저녁을 모두 캄포광장에서 먹으며 시에나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즐긴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이제 어둠이 살포시 내려앉는 시간이 되어 자리를 털고 호텔로 걸어 내려갔다. 아까 체크인하면서 보았던 호텔 부속식당이 생각났다. 프런트 직원에게 혹시 밤 시간에도 이용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다행히 단번에 허락을 받았다. 대신 우리가 사용한 식기들을 한 곳에 정리해 둘 것과 밤 11시까지만 이용해 달라는 당부가 있었다.
호텔 식당에서의 특별한 밤
각자 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8시에 다시 식당으로 모였다. 과일과 간식거리를 와인과 함께 즐기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시원한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 시에나의 야경도 감상하며, 여행의 즐거운 추억을 나누는 순간이 좋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피렌체에서 방문할 두오모 대성당의 부속건물인 산조반니 세례당에 대한 공부였다. 그곳의 동쪽 청동문, 바로 기베르티의 그 유명한 '천국의 문'에 새겨진 성경 이야기들을 설명해 달라고 김 변호사의 부인인 김 여사에게 여행 사전모임 때 미리 부탁했었다. 마침 그 공부 시간을 시에나 호텔에서 갖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열심히 준비한 김 여사의 명강의를 경청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물론 일부 멤버는 졸음과의 전쟁을 치르기도 했지만, 기베르티가 27년에 걸쳐 완성했다는 '천국의 문'의 10개 패널에 담긴 구약성서 이야기들—아담과 이브, 카인과 아벨,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에서, 요셉 이야기, 모세와 십계명, 여호수아와 여리고 성, 다윗과 골리앗, 솔로몬과 시바 여왕—을 차근차근 익혔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조각가들이 경쟁했던 이 세례당 문 제작 과정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1401년, 피렌체 상인 길드는 북쪽 문 제작을 위해 공개경쟁을 열었고, 젊은 기베르티가 브루넬레스키를 비롯한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선정되었다. 그리고 그 성공에 힘입어 25년 뒤, 동쪽 문까지 맡게 된 기베르티는 평생의 역작을 남기게 되었다. 미켈란젤로가 이 문을 보고 "천국의 문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라고 극찬했다는 일화까지 들으니, 내일 피렌체에서 직접 마주할 그 문이 더욱 기대되었다.
여행의 깊이를 더하는 법
여행할 때 여행지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를 미리 해 가면, 그만큼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지고 경험도 풍성해진다. 자연을 맞이하든, 인류유산을 대하든, 예술작품을 감상하든 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우리가 방문할 주요 장소에 대해 일부 멤버들에게 미리 준비를 맡기는 실험을 해 보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각자가 맡은 주제에 대해 공부하고, 그것을 일행들과 나누는 과정에서 여행은 단순한 관광을 넘어 배움과 성찰의 시간이 되었다. 김 여사의 '천국의 문' 강의가 대표적인 예였다.
나중에는 한 단계 더 나아가, 멤버들이 하루씩 맡아 그날의 일정 계획을 준비하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가 될 것 같다. 이렇게 하면 각자의 참여의식도 높아지고, 여행의 재미와 몰입감도 한층 깊어질 것이다. 다음 여행에서는 꼭 시도해 볼 예정이다.
밤 11시가 가까워지자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내일은 드디어 피렌체다. 르네상스의 심장부, 메디치 가문의 도시, 단테와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숨 쉬던 곳. 그리고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이 기다리는 곳. 설렘을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