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가득한 와인의 고향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몬테풀치아노였다. 몬탈치노와 함께 토스카나 와인의 양대 산맥으로 손꼽히는 이곳으로 향하는 길, 피엔차와의 중간 지점에서 발도르차 평원을 가로지르게 되었다. SNS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포토 스폿(Cipressi di San Quirico d'Orcia)이 근처에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일행과 함께 그곳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여기서 구글 지도의 한계를 또다시 실감하게 되었다. 분명히 경로가 표시되어 있었지만, 비포장도로를 한참 따라가다가 결국 사유지 진입로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메인도로로 복귀했는데, 조금 더 달리자 아이러니하게도 아까 찾던 그 장소가 멀리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미 속도를 낸 상태라 차를 세우기에는 늦어버렸고, 창밖으로 아득히 바라보며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언덕 정상에서 원형으로 늘어선 그림 같은 장소였다. '인생사진'을 남기려는 젊은 연인들이 즐겨 찾는다고 했다. 미리 알았더라면 간선도로 안전지대에 주차하고 10여 분만 걸어갔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물론 우리 같은 시니어들에게는 굳이 그 수고를 감수할 만한 곳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위안을 삼았다.
드디어 몬테풀치아노에 도착했다. 언덕 위에 자리한 이 아름다운 르네상스 마을은 토스카나 마을의 전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2000여 년의 세월을 품은 이곳은 르네상스 시대에 피렌체, 시에나, 로마가 서로 차지하려 다툰 전략적 요충지였고, 최종적으로는 피렌체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비옥한 포도밭 덕분에 세계 최고의 와인 생산지로 명성을 떨치며, 토스카나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몬탈치노 와인을 BDM이라 부르듯, 이곳의 와인은 '비노 디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라는 우아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 역사적인 마을을 제대로 경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두 발로 직접 걷는 것이다. 성문인 포르타 알 프라토(Porta al Prato)를 통과해 마을로 들어서면, 정상의 그란데 광장(Piazza Grande)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공영주차장 이용은 이제 익숙한 절차가 되었다. 정산기에 차량번호와 예상 주차시간을 입력하고, 현금이나 카드로 요금을 결제한 뒤 영수증을 대시보드 위에 놓아두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주차장을 벗어나자마자 마주한 포르타 알 프라토는 첫 만남부터 깊은 인상을 남겼다.
프라토 성문은 유사시 육중한 철제 창살문이 위에서 내려와 입구를 완전히 봉쇄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몬탈치노에서처럼 이곳도 거의 모든 건물이 와인숍이나 식당으로 채워져 있어, 어디를 가도 훌륭한 음식과 와인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미리 예약해 둔 식당(La Vineria di Montepulciano)의 위치를 확인하고, 예약시간보다 일찍 식사가 가능한지 알아본 후 본격적으로 마을 탐험에 나섰다.
조금 더 오르자 아기자기한 시계탑(Pulcinella tower)이 모습을 드러냈다. 탑 꼭대기에서는 익살스러운 풀치넬라 인형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며칠 후 나폴리 스파카나폴리 거리를 거닐다 이 인형을 다시 마주쳤을 때,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한 반가움이 밀려왔다.
거리에는 개성 넘치는 선물가게와 매력적인 식당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골목마다 운치가 가득했다.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전망 포인트에 도착하니 비록 일망무제(一望無際)라고는 할 수 없지만, 탁 트인 시야 속으로 토스카나의 평원이 시원스럽게 펼쳐졌다. 곳곳에 불쑥불쑥 솟아 있는 사이프러스 군락들은 "여기가 바로 토스카나다!"라고 외치는 듯했다. 성문과 언덕길이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중세의 정취가 한층 더 짙게 느껴졌다.
몬테풀치아노는 중심부로 갈수록 고도가 높아지는 요새 같은 구조를 띠고 있다. 바깥쪽에서 시작해 경사진 골목을 빙글빙글 따라 올라가면, 마침내 가장 높은 곳의 중심 광장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 덕분에 마을의 와이너리들은 지층에서 고층으로, 혹은 고층에서 지층으로 연결되는 독특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양조 시설 역시 이 지형을 영리하게 활용해 조성되었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규모감 있는 지하 셀러와 양조장을 무료로 둘러볼 수 있는 곳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관광객들이 몬테풀치아노에 매력을 느끼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좁은 골목 사이로 자리한 아기자기한 에노테카와 레스토랑들은 와인 애호가는 물론 일반 여행자에게도 완벽한 여행지로 만들어준다.
이윽고 몬테풀치아노의 핵심 명소인 그란데 광장과 그 중심의 두오모로 향했다. 가는 길에 잠시 방향을 헷갈려 약간 헤매기도 했다. 1600년 전후에 지어진 두오모는 아쉽게도 현재 복원 중이라 임시 휴관 상태였다. 외관을 더 정교하게 장식할 계획이 있었으나 결국 거친 석조물 그대로 미완성인 채 남겨졌다고 한다.
몬테풀치아노는 영화 〈트와일라잇: 뉴문〉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특히 두오모와 그란데 광장이 배경으로 등장했던 장면을 여행 프로그램에서 본 기억이 났다. 내부를 볼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왔던 골목길을 피해 다른 길을 택했다. 중세 분위기가 가득한 골목들을 조금이라도 더 느껴보고 싶었다. 정취를 만끽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예약한 식당에 도착했다.
마을 초입에 자리한 이 식당은 중세풍 외관과 달리 내부는 세련되게 꾸며져 있었다. 친절한 종업원의 추천을 받아 대표 메뉴를 주문하고, 몬테풀치아노 와인을 곁들여 식사를 즐겼다. 기대했던 대로 음식 수준도 훌륭했다. 다만, 종업원이 워낙 바빴는지 우리가 추가로 주문한 프로슈토를 깜빡 잊어버릴 정도였다.
식당을 나선 후, 건너편의 분위기 좋고 세련된 카페(Palazzo Avignonesi Caffeteria)에서 커피를 마시자는 의견이 나왔고, 일행 모두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천장의 프레스코화와 세심한 조명이 어우러져 우아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잘 복원된 공간에서 맛있는 커피와 케이크를 즐겼다. 가격이 다소 비싸긴 했지만, 이곳만의 고급스러움과 독특한 매력을 고려하면 충분히 납득할 만했다. 종업원들도 정중하고 친절하게 우리를 맞아주어 특별한 대접을 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다만, 천장의 프레스코화가 예술적으로는 훌륭했지만 일부 장면이 다소 외설적으로 느껴져 부부 동반 자리에서는 살짝 민망하기도 했다. 우리는 제법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카페의 호사로운 분위기를 만끽했다.
그런데 막내 커플의 부인이 화장실을 이용하러 간 후 예상보다 오래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이 카페로 들어가 확인해 보니, 화장실 문이 열리지 않아 부인이 안에 갇혀버린 것이었다. 남편이 백방으로 문을 열어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카페 주인과 종업원들까지 나섰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칫 문을 부술 뻔했으나, 다행히 극적으로 문이 열리면서 부인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세련되고 화려한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카페에서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질 줄이야.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폐쇄된 공간에 갇히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일 것이다. 부인에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기를 모두가 바랐다.
문득 2년 전 홍콩 출장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미팅 전에 건물 로비 화장실을 이용하려 했는데, 비밀번호나 ID카드 없이는 출입이 불가능한 구조였다. 당황하고 있을 때 마침 입주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을 따라 들어가 볼일을 보았다. 그런데 나올 때도 같은 인증이 필요했다. 화장실 안에 아무도 없어 약 10분간 갇혀 있다가, 다행히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순간 재빨리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기억이 생생했다.
우여곡절 끝에 일행은 주차장 부근으로 돌아와 일몰을 감상했다. 너무나 황홀하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전날 피엔차에서 본 일몰도 멋있었지만, 같은 토스카나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단정 짓기 어려울 정도로 각각의 매력이 있었다.
과연 죽기 전에 이곳을 다시 올 수 있을까? 죽음을 앞둔 탄식이 아니라, 아직 둘러보고 경험해야 할 곳이 너무나 많다는 뜻이다. 가급적 새로운 장소를 찾아다니는 여행 스타일 때문에, 한 번 간 곳을 재방문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아쉬운 푸념이다. 4시간의 주차시간이 어느새 훌쩍 지나갔다. 시간이 더 허락된다면 몬테풀치아노에서 하룻밤 묵으며 중세의 멋스러움과 분위기를 충분히 즐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차를 타고 피엔차의 숙소로 돌아왔다. 토스카나에서의 두 번째 밤이었다. 내일 아침에는 오늘 찾지 못했던 '막시무스의 집'을 다시 찾아보고 일출도 감상할 계획이었다. 희망자들은 새벽 6시 반, 숙소 앞마당에서 만나 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며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