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평화가 공존하는 곳, 피엔차

발도르차, 사이프러스 나무가 그린 풍경

by 트릴로그 trilogue

언덕 위의 시간 그리고 우연히 발견한 보석


아시시를 뒤로하고, 이제 토스카나의 심장부, 발도르차 평원을 향해 달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평원은 완만한 언덕과 광활한 초원으로 유명하다. 우리가 방문한 9월 말은 봄철의 싱그러운 초록빛을 경험하기엔 늦은 시기였지만, 언덕 위로 줄지어 선 키 큰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충분히 그림 같았다.


발도르차 지역에는 중세풍의 작은 마을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피엔차, 몬탈치노, 몬테풀치아노—각각 독특한 역사와 매력을 지닌 이 마을들이 우리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다. 아시시에서 예약한 아그리투리스모(농가민박)까지는 80km 거리. 이동 중 내일 오후 방문할 예정인 몬테풀치아노를 지나쳤고, 피엔차가 눈앞에 다가올 즈음, 사이프러스 나무가 줄지어 선 인상적인 농장이 보였다.



농가 입구에 차들이 대여섯 대 정차해 사진을 찍고 있길래, 우리도 덩달아 차를 멈췄다. 일행을 기다리며 사진을 찍다 살펴보니, 그 농가도 아그리투리스모(Palazzo Massaini)였고 와인 농장을 겸하고 있었다. 마침 숙소에서 마실 와인을 사려던 참이었다.


Palazzo Massaini


나머지 일행이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사이프러스 길을 따라 와인농장으로 올라갔다. 아기자기한 농가 건물과 와인샵,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풍경이 아름다웠다. 나는 호기심에 이끌려 와인샵으로 들어가 이 농장에서 직접 생산하는 레드 와인 두 병을 추천받아 구입했다. 이후 일행들과 함께 뒷마당에 자리 잡고 30분 정도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다.


'만약 이곳을 미리 알았더라면, 주저 없이 여기로 예약했을 텐데...'


역시 현지에서 직접 경험하며 얻는 정보가 가장 값지다. 이런 정보를 공유하면, 나중에 이곳을 찾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이 글을 쓰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우리는 5km 떨어진 숙소, 아그리투리스모 마리넬로(Agriturismo Marinello)를 향해 다시 길을 나섰다.


피엔차 마을을 지나 남쪽에 위치한 숙소에 도착해 체크인을 마쳤다. 짐을 풀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내로 나가 천천히 마을을 거닐며 일몰을 감상할 계획이었다. 저녁에는 미리 예약해 둔 레스토랑에서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기로 했다. 이틀 밤을 묵을 숙소는 전형적인 농가주택의 따뜻한 분위기를 품고 있으면서도 쾌적한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예약한 방마다 크기와 분위기가 달랐는데, 각자 취향대로 방을 골랐다.

Agriturismo Marinello




피엔차, 고지대에서 내려다본 토스카나


이탈리아 중세 도시들은 대개 요새로 활용하기 좋은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덕분에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압도적이다. 과거 적들의 동태를 살피던 저 아래 펼쳐진 들판과 사이프러스 나무들은 이제 황홀한 전망을 선사하는 장소가 되었다. 아시시가 그러했고, 지금 서 있는 피엔차가 또 그러하다. 아마 내일 마주할 몬탈치노와 몬테풀치아노에서도 같은 감동을 느끼게 되리라.


41-2.jpg 피엔차의 전경

피엔차는 르네상스 시대 도시계획의 모델로 여겨지는 마을로, 1996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중세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특별한 사연도 품고 있다. 바로 1968년 영화 〈로미오와 줄리에트〉의 촬영지였던 것이다. 당시 15세의 올리비아 허시가 줄리엣을 연기했던 그 영화. 피엔차 대성당과 피콜로미니 궁전이 주된 촬영지로 쓰였다.


피엔차 대성당과 피콜로미니 궁전


얼마 전, 올리비아 허시가 7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 더욱 안타까웠다. 여담이지만, 우리가 익숙하게 불러온 '올리비아 핫세'라는 이름은 '허시(Hussey)'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단어 중에 여전히 일본식 표현이 남아 있다는 점이 새삼 놀라웠다.


아름다운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니, 피엔차 언덕의 풍경이 살짝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침내 토스카나의 끝없이 펼쳐진 구릉지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는 들판과 부드러운 능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눈앞의 광경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일몰 포인트에서 바라본 평원과 주변 분위기


일몰 명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성벽을 따라 늘어선 식당들의 야외 테이블도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만큼 북적였다. 우리도 손에 핸드폰을 꼭 쥐고, 하나라도 더 담아두려는 마음으로 풍경과 서로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그 순간의 모든 것이 완벽했다.


마을을 좀 더 거닐다 보니 배가 고파져서, 예약한 식당(Trattoria La Buca delle Fate)에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찾아갔다. 혹시 지금 저녁을 먹을 수 있냐고 조심스레 물어보니, 직원이 확인 후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사실 이 식당은 작년 큰아들 부부가 유럽 여행 중에 우연히 들렀던 곳이었다. 그때 먹었던 트러플 파스타가 너무 맛있어서 '인생 파스타'라고 극찬하며 나에게 강력히 추천했던 것이다. 게다가 구글 평점도 꽤 높아서 우리의 기대감이 한껏 부풀었다.


Trattoria La Buca delle Fate의 모습과 주문했던 음식


식당은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우리는 파스타와 피엔차의 대표 요리인 멧돼지 요리를 와인과 함께 주문했다. 그런데 이탈리아 식당답지 않게 음식이 예상보다 빨리 나왔다. 파스타 면이 살짝 퍼져 있어서, 지금까지 먹었던 이탈리아 파스타와는 식감이 달라 다소 아쉬웠다.


이번 여행에서 식당 예약은 대부분 내가 맡았던 터라, 일행들의 만족도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다들 웬만하면 불평을 잘하지 않는 분위기라, 혹시라도 기대에 못 미치면 어쩌나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함께 시킨 멧돼지와 치킨 요리는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토스카나 와인과의 조화는 완벽했고, 모두가 한 입 맛볼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숙소로 돌아오자 두 커플은 피곤하다며 먼저 방으로 향했다. 우리와 막내 커플은 아까 사둔 와인 중 한 병을 따서 비로소 토스카나의 첫 밤을 제대로 만끽했다. 모두 함께 수다를 떨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여행 중에는 컨디션 조절도 중요한 법이다. 먼저 쉬러 간 일행들이 편안한 밤을 보내길 바라며, 우리는 남은 시간을 조용히 보냈다. 자정 무렵, 아쉬움을 뒤로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내일은 몬탈치노와 몬테풀치아노가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