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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deep seated person May 18. 2024

잊지 않는 것과 잃어버리는 것

마흔 살이 될 때까지 잃어버린 모든 것들이 안타깝습니다.

넷플릭스에서 한창 재밌게 어떤 시리즈를 보던 도중 내 뒤를 지나가던 아내가 되게 재밌나 보다며 두 번 볼 정도냐고 물었다. 난 분명 본 기억이 없는데 무슨 소리냐 되물으니 같이 본 것 기억나지 않느냐며 처음 보는 시리즈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낸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되돌아보면 나는 학창 시절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기억하는 부분은 아주 세밀하게 기억한다. 아마도 그 기억은 내가 잘못한 결정들의 순간일 것이다. 속으로 몇백 번은 다시 생각했을 순간들 일 것이다.


그런 범주에 들지 못한 순간들과 사람의 얼굴들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굉장히 신세 진 어느 분의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해 그분이 전화까지 했지만 목소리를 듣고도 기억하지 못해 그대로 인연이 끊어져 버렸다. 중요한 면접의 날짜나 시간이 아니라 그 면접이 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해 면접관이 전화까지 했지만 떠올리지 못해 전화기 너머로 욕을 들은 적도 있다. 몇십 번은 더 보았을 아이 친구들의 부모 얼굴 역시 마찬가지다.


저 기억 안 나세요? 1년 전에 프로젝트 같이 했었잖아요. 이상하네? 정말 기억 안 나세요?


먼저 인사하지 않는 내가 고깝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길거리에서 내게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다 엉겁결에 피상적인 안부를 묻고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난 경험도 많다. 그런 경험들이 쌓이다 보니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두려워진다. 해야 할 일은 메모라도 할 수 있지만 사람의 얼굴은 메모할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고까운 사람이 되자.


나는 다행히 고까운 사람이 되어도 괜찮은 환경에 살고 있다. 회사에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해 직장 동료 들과 얼굴을 맞대고 일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도 아니라서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도 없다. 아마도 ADHD를 가진 나에게 최적의 환경일 것이다.  



이제 약을 복용하며 증상이 완화되니 내가 잃어버린 것들이 조금씩 보인다.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들이 비어버린 곳에 무엇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며칠 전만 해도 무엇인가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이젠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이 적응되지 않는다. 한동안 집안을 서성이고 저 멀리 보이는 바다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걸까? 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데 난 그동안 뭘 했던 걸까. 잊지 않는 것이 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잊을 수 없는 것만 자꾸 떠오른다.


멍하게 서있지만 말고 뭘 좀 해. 할거 없으면 넷플릭스라도 보든지.


내가 어떤 상황이든 나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뒤돌아보면 과몰입이었다. 역할에 과몰입해 나만의 기준과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는 것에 몰입했다. 나에게 조금 느슨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ADHD를 가진 사람들에겐 힘든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다. 물론 역할이나 규칙에 과몰입하는 것만이 아니다. 워킹데드의 스토리에 과몰입해 주인공 무리가 괴롭힘을 받는 것을 참지 못해 꺼버리고 아직도 엔딩을 보지 못했다. 아침까지 잠을 자지 않고 애니메이션을 몰아본다든지, 게임을 하는 것도 포함이다.


약을 복용한다고 해서 이런 것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횟수가 현저히 줄고 강도 또한 낮아졌다. 가끔 과몰입의 느낌이 몰려오면 자나팜을 복용하고 누워서 천천히 느긋하게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잠이 온다. 요즘은 잠이 늘었다.


취미를 가지려 노력하고 있다. 진단을 받기 전 취미는 머릿속의 생각을 멈추려는 것이었다면 요즘 고민하는 취미는 그 생각이 빈 어느 공간을 채우려는 노력이다. 몇 가지나 떠올리고 생각해 봤지만 결정하기가 너무 어렵다. 언젠가 결정하고 실행해서 느긋하게 즐기고 싶다. 이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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