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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deep seated person May 17. 2024

단순함을 유지하는 방법

마흔 살이 되어서야 조금은 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목은 마치 단순함을 유지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처럼 정했지만 사실 그런 건 없다. 지난 글들을 읽었다면 알겠지만 내 삶을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서 많은 것들이 희생되었다. 희생이라는 표현을 쓰자니 조금 구차해 보인다. 나에겐 희생된 그것들이 나에게서 떠나갈 때도 지금도 그다지 큰 것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건 좀 그만 잊어버려라. 정신을 딱 차리고 물건 간수 잘하란 말이야.


흔히 ADHD가 있는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고 해야 할 일을 미룬다고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어린 시절에 나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렸다. 경제적인 주체가 되지 못했던 10대와 자의식 과잉으로 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던 20대는 이런 내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실수와 잘못들이 있었다. 그래서 부모님을 포함해 다양한 사람으로부터 많은 질책을 들어야 했다. 이런 경험은 사람을 소극적이고 내향적으로 변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이런 경험들이 모든 일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만들려는 행동방식(좋은지 아닌지 모르겠지만)을 가지게 만들었다.


되도록이면 나는 검은색 옷만 구입하려 한다. 이 옷을 며칠 입었는지 생각하고 세탁해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도록 속옷은 두세 벌만 가지고 돌려 입으며 한 번 입은 옷은 무조건 세탁했다. 옷을 고를 필요가 없도록 외출할 때 입는 옷을 부위별로 각 두벌, 집에서 입는 옷을 두벌 정도 두고 유니폼처럼 입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식사도 되도록이면 간편하게 해결했다. 오이 두 개에 삶은 계란 3–5개 정도로 점심을 해결하고, 저녁은 같은 가게에서 메뉴만 돌려가며 먹었다. 내가 해야 할 일들은 아이폰의 캘린더를 이용해 이벤트를 바로 생성한다. 그러나 현실은 내 계획과는 다르게 움직인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은 고작 복장이나 식사 메뉴였고, 직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요청들이나 요구들에 익숙해지기에는 꽤 시간이 걸렸다.  



ADHD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겠지만(아닐지도,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내가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일에서는 패턴을 찾아내는 것에 익숙하고 능숙하다. 아마도 우리의 뇌는 최대한 일을 효율적이고 빠르게 수행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패턴을 찾아내면 그것을 수행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 돌아다니는 수백 수천 가지의 생각 촉수들이 예상되는 시나리오를 만들고 가지를 뻗어나가기 시작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다. 단지 머릿속이 조금 더(많이, 더 많이) 복잡해질 뿐.


왜 맨날 같은 옷만 입어요? 마크 주커버그 따라 하는 거예요?


이렇게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내 환경이 그것에 맞게 움직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일종의 운도 작용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난 안될 거야 라며 포기해 버린 것들도 사실 많다. 그것을 희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상상 속의 나는 조금 더 여유롭고, 다채로운 색상의 옷을 좋아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사람들과 격 없이 어울리고 가끔은 사람들을 큰 소리로 대담하게 이끌고 싶은데 약을 복용 중인 지금도 습관을 버리긴 쉽지 않고 두렵다. 사실. 내가 희생한 게 무엇인지 장황하게 쓰려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약을 처방받기 전에는 억울했던 것들을 쏟아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모든 것이 말끔히 사라진 것 같다.


나는 내 장애로 인한 문제를 막기 위해 삶을 단순하게 유지해 온 것인데 약을 복용함으로써 목적을 이룬 셈이 되었다. 내 모든 글이 “그래서 약을 드세요. 이것만에 해결책입니다.” 하는 것 같아 마음에 썩 들지는 않고, 약에 대한 환상을 키우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ADHD를 가진 사람의 쓸모없는 걱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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