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살에 처음으로 받게 된 정신과 약을 조금 더 늘렸습니다.
약을 저녁에 한번 드셔보세요.
선생님은 약을 저녁에 먹으라고 권해주셨다. 아토목신의 반감기가 길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아빌리파이의 약효가 줄어들까 봐 걱정했지만 아빌리파이의 반감기는 더 길었다. 약에 대해 공부하지 않은 탓이었다.
복용 시간을 바꾸고 다시 약에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했다. 약을 아무리 잘 챙겨 먹어도 간간히 하품이 나오고 졸릴 때가 있었다. 회사에는 사정을 간단히 설명했다. 비교적 배려해 주었기 때문에 업무에 힘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 있었다. 이 스스로에 실망감 또한 근거가 없으면서도 인색하고 엄격하다.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가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일어나면 나에 대한 혐오와 자책이 시작된다. 짧으면 몇 시간에서 길면 며칠까지 연속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된다. 마치 어벤저스의 도르마무 씬처럼 내가 이렇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저렇게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며 분주히 생각하느라 모든 에너지를 소비하고 그 생각을 하는 동안에는 굉장히 예민해져서 거슬리는 무엇인가를 참을 수 없다. 결국 화가 난다.
지금 돌이켜보면 약을 복용하기 이전에는 화를 내지 않으려 고민하고 내 머릿속의 생각을 멈추기 위해 갖은 수를 썼지만(술을 떡이 되도록 마신다든지, 명상을 시도해 본다든지, 요가를 배워 몸을 일부러 아프게 만들어 의식을 돌리려 노력하기도 했다.) 효과가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참을 수밖에 없어서 참다가 일정한 단계가 넘어가면 더 심하게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이 화는 나를 향하기도, 내가 아닌 누군가를 향하기도 했다.
그래서 결혼 전에 혼자 살 때는 내 손가락 뼈가 골절될 만큼 벽을 쳤다. 혼자 살 수밖에 없었다. 가족 또한 나에겐 적이었다. 이런 화를 억누르게라도 된 계기는 고양이를 양육하게 된 것이었다. 일종의 책임감을 갖게 해 주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동물의 체온이라는 것은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내가 나 또는 타인에 대한 극도의 혐오로 미쳐버리는 순간에도 고양이는 배가 고프거나 심심해했고 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생물의 욕구를 내 기분 탓으로 거절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화를 억누르는 것일 뿐 실질적인 해결방법은 되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내게는 아토목신과 아빌리파이의 조합이 내 집중력을 되살려주지는 못했다. 복용 시간을 조절한 뒤 잠은 덜 왔지만 멍하게 모니터를 보는 증상은 그대로였다. 다시 병원을 방문하기까지 2주간의 지루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런 약들을 복용하면서 바뀐 것이 있다면, 내 몸의 병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이 너무 높은데, 몸 괜찮아요? 불편한 거 없어요? 치료받으셔야 해요.
혈액 검사를 할 때마다 당뇨에 대해 들었다. 그럴 때마다 어차피 모두 죽는데 당장 죽는 병 아니면 뭐가 큰 걱정이냐며 가볍게 흘려 넘겼다. 최근에 온몸이 칼로 베인듯한 통증에도, 팔다리에 냉기가 흘러도, 목이 자주 말라도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을래 같은 말을 하며 넘겼다. 그런데, 적절한 약을 먹으며 ADHD 증상들이 조절되는 것을 경험하고 나니 당뇨도 치료하고 싶어졌다.
몇 번의 고민 끝에 정신과에서 가까운 내과를 예약했다.(당연히 예약하고 진료를 받아야 하지만, 모든 일에 쉽게 결정할 수 없는 것도 ADHD의 증상 중 하나라 한다. 내 건강을 위해 병원을 예약하고 방문하는 것조차도) 당뇨에 대한 얘기는 후에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저 몸에 대한 나의 생각이 바뀐 계기를 설명하고 싶었다.
오랜 기다림 뒤에 다시 예정된 날짜에 정신과를 찾았다. 선생님은 집중력에 대해 걱정해 주셨고 아토목신의 용량을 늘리는 것을 제안했지만 나는 콘서타를 혼합 복용해 보겠다고 했다. 왠지 선을 넘는 제안 같았지만 집중력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찾아보니 콘서타를 혼합 복용 하는 사례는 흔했다.
선생님은 흔쾌히 동의해 주셨다.(항상 동의해 주신다.) 대신 약을 변경하는 것에 대해 걱정하시며 재진 날짜를 조정했다. 새 약을 추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을 방문할 때마다 연차를 사용하고 있지만 결국 나의 몸을 위해서, 내 가족을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