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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deep seated person May 15. 2024

자나팜과 나 – 01

마흔 살에 처음으로 정신과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나팜은 나에게 꽤 잘 맞았다. 이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인지, 위약 효과인지 모르겠지만 ADHD치료제인 아토목신이 주는 편안함과는 다르게 자나팜은 늘 불안하고 초조함에 시달리는 나를 달래주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매일 복용하지는 않는다. 갑자기 몰려오는 불안감을 줄이거나 아토목신도 없애주지 못하는 머릿속에서 끝없이 맴도는 생각들을 조금이라도 덜 하고 싶을 때 찾게 된다. 선생님도 매일 복용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빠르게 효력이 나타나기 때문에 참을 수 없는 화가 나거나 불안할 때 사용 하는 것이 좋다는 설명이 있었다.


뭐에 그렇게 화가 났어? 얘기를 좀 해봐.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불안해진다. 책상 위에 가만히 자리 잡은 컵의 위치, 옆 사람의 숨 쉬는 소리, 코 끝에 닿는 공기의 질감, 내 미래, 내일 아이가 챙겨 가야 할 책가방 같은. 아무런 이유도 없고 일관성도 없다. 끊임없이 불안한 것들이 생각나고, 그 꼬리를 이어 간다. 내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들이 가득 차면 불쾌해진다. 그 불쾌함 속에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엄격한 그 기준에 어긋난 무언가가 생겨나면 나에겐 그것이 가진 의미보다 큰 화로 다가온다. 그렇게 내 몸과 정신의 제어를 뺏겨버리게 된다.



불안에 잠식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사실 큰 의미가 없었다. 나는 마흔이 될 때까지 스스로 ADHD라고 의심하지 않았고, 인스타그램이나 웹 서핑 중에 보이는 ADHD 콘텐츠들을 보며 ‘이런 것도 있구나 ‘라며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난 그저 가족이나 나 자신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아서 정신과를 찾아갔었다.


선생님 ADHD가 병이라면 약을 먹어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ADHD 진단을 받고 약을 복용하며 이것저것 찾아보게 된다. 그러다 알고리즘에 의해 지난 언젠가 보았을 법한 ADHD에 관련된 스토리나 게시물들을 보며 내가 왜 몰랐을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선생님은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다양한 증상이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가끔은 내 몸을, 나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지난 세월을 제대로 살지 못한 것 같아서 속상하다. 그리고 나의 정상적이지 않은 반응으로 인해 상처받았을 사람들에게 미안해진다.


어쨌든 요즘은 자나팜으로 조금은 부담을 덜어낼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가끔씩 확인해 보면 약이 효과가 있는 것 같다고 알려준다. 그럴 때마다 나는 ADHD가 나에겐 장애나 증상이 아니라 병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2주가 지나고 다시 병원을 찾았고, 선생님은 내 얘기를 듣더니 약을 증량해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증량된 약을 늘 복용하던 아침시간에 먹었다가 며칠 동안 고생했다. 업무를 하는 내내 잠이 오고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매 순간 문서들을 비교하거나 확인해야 하는데 최소 2–3분 이상 멍하게 모니터를 보는 일이 잦아졌다. 증량한 아토목신 탓인지 잠이 부족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전날 자나팜을 먹고 푹 잤지만 그다음 날의 상태는 똑같았다.


병원에 급하게 방문할 수 있었지만 기다려보기로 했다. 재진 날짜까지는 꽤 남았지만 예상외의 이벤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되도록이면 나는 예상외의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분명히 실수가 발생할 것이고 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다. 그래서 처음 만난 사람과의 대화하기 위한 스크립트가 있을 정도다. 기다림은 길고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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