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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Jun 10. 2024

금동이의 아름다운 술은.....,

金樽美酒千人血(금준미주천인혈, 금동이의 아름다운 술은 천 백성의 피요)

玉盤佳肴萬姓膏(옥반가효만성고, 옥쟁반의 맛있는 고기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燭淚落時民淚落(촉루낙시민루락,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들의 눈물이 떨어지고)

歌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원성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의 소리 드높다)


어떤 정치인이 대통령의 실정을 비판하면서 비유를 하여 많이 회자되고 있는 한시 내용이다. 걸인으로 위장한 암행어사 이몽룡이 변학도의 생일잔치에서 술을 얻어먹은 답례로 지어서 사또에게 올리자 모두 혼비백산했다고 한다. 교과서에는 없었지만 고등학교 한문시간에 배워서 지금까지 한글음과 해석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고교시절은 아름다운 추억보다는 삭막한 환경에서 어렵게 학창 시절을 보낸 기억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교실도 짖지 않고 신설된 학교라서 중학교 운동장 한쪽 창고 같은 임시교사에서 수업을 받았다. 목재 골조에 까만색 판자를 붙인 판잣집 형태의 건물이었다. 산은 높고 골이 깊은 지역이라서 바람도 자주 불었는데, 바람이 운동장의 흙을 몰고 와서 교실 건물을 세차게 때리면, 엉성한 창문과 벽틈으로 흙먼지가 들어와 책상 위에 내려앉았다. 학교 앞 개울에는 시커면 석탄물이 흘렀는데, 교량이 없으니 개울 바닥으로 오솔길을 내고 물 흐르는 부분에 공사장 패널 1장을 걸쳐 놓고 건너 다녔다. 비만 오면 패널과 길이 떠내려가서 멀리 돌아가야 하니 학교 앞에 교량을 놓는 것이 오랜 숙원사업이었다. 선거철 후보자나 높은 사람이 방문할 때마다 교량을 놓아준다고 공수표를 날렸다. 교장은 그 말을 믿었는지 학생들에게 "높으신 분이 다리를 놔준다고 약속했으니까 학생들도 성의를 보여야 한다"며 체육시간은 작업시간이 되었고, 틈만 나면 개울 바닥에서 자갈을 모아서 쌓아 놓으라고 시켰다. 자갈을 쌓아 놓아도 공사를 하지 않으니 비가 오면 쓸려 내려가 버리고, 다시 자갈을 쌓아 놓았다가 비가 오면 또 쓸려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졸업할 때까지도 다리공사는 하지 않았는데, 10년쯤 지나서 가보니 교량이 세워져 있었다.


'교련'과목이 있었는데 2학년 때 군부대에서 교련검열을 나온다고 했다. 신설학교이니 첫 검열을 잘 받아야 한다며 교련교사와 젊은 교사들이 학급별 담당을 맡아 1주일 동안 수업을 전폐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다. 동작이 틀리는 학생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단체기합을 줬다. 돌이 있는 흙바닥에 원산폭격(바닥에 머리를 대고 엎드려 뒷짐을 지는 자세)을 시킨 상태에서 그대로 회전하도록 시켜서 머리가 땅에 쓸리며 상처가 나는 애들도 있었다. 나중에 논산훈련소에 가보니 고등학생 때 훈련이 더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주일이 지나고 군부대 검열이 끝나자 우리 학교가 1등 했다며 교장과 교사들이 즐거워했다. 교장과 교사들은 학생들을 인격체로 본 것이 아니라 본인들 점수 챙기는 수단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교사도 있었다. 교사들에게 첫사랑 얘기를 해달라고 하는 것은 시대를 불문하는 것 같다. 첫사랑 얘기라고 하면서 대학교 다닐 때 여학생을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 손날로 목덜미를 쳐서 쓰러뜨리고 ㅇㅇ했다는 말을 죄의식 없이 무용담 처럼 했다. 교사라는 자가 철없는 고등학생들 앞에서 범죄를 자백한 것이다. 애들이 호기심에 따라 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나?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 당연한데 '교사'라고 하니 의아해 할 수도 있다. '선생님'이라고 하면 존경심이 떠오르는 호칭이지만, 존경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교단에 섰으니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우리 학교에도 진짜 선생님의 품위가 느껴지는 한문 선생님이 부임해 오셨다. "공무원 하는 제자들이 한문을 쓸 일이 많다고 하더라"라고 하시며 영어 실력이 모자라니 한문이라도 제대로 배우면 사회생활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춘향전 얘기와 함께 딱딱한 교과서에는 없는 이몽룡의 한시를 칠판에 적어놓고 가르쳐 주셨다. 그때부터 한문에 흥미를 느끼고 공부할 수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학교로 전출을 가셨다. 교육청에서 수학여행 때문에 감사를 나왔었는데, 수학여행비 걷은 돈에서 교장과 교사들이 부정을 저질렀다고 내부고발을 해서 전출을 가셨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두운 시절이니 잘못한 교장과 교사들이 모의를 해서 오히려 내부고발자를 쫓아낸 것 같다.


그때는 몰랐는데 성인이 되어 직장생활을 해보니 충분히 의심을 살 만한 수학여행이었다. 설악산 코스를 선정했는데, 관광버스가 첫째 날 설악산 가는 길 주변 관광지를 들려서 숙박단지에 내려 주고는 돌아갔다. 둘째 날부터는 매표소에서도 3km나 아래에 있는 숙소에서 설악산 주요 코스까지 걷거나 뛰어서 오르내리며 관광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 하루만 버스를 타고 삼척의 해수욕장에 들려 점심 도시락을 먹고 학교로 돌아왔다. 비용은 다른 학교와 비슷하게 걷었지만 기간 중 2일만 관광버스를 이용했는데, 버스회사 사장이 교사의 형이라는 말이 있었다. 보통의 가정에서도 쌀밥을 먹던 시절에 여관에서 제공한 도시락이 보리밥과 장아찌 반찬으로 아주 부실했다. 교사가 봐도 도시락이 형편없었는지 "집 떠나면 원래 고생도 해 보는 것"이라며 다독였는데, 학생들에게 가스라이팅을 했던 것 같다.


당시 부모님들은 아이가 기합을 받다가 다쳐도 내 아이가 잘 못했겠거니 하고 교사들을 믿고 항의하는 부모도 없었으니, 교사들은 학생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무모하게 다뤘던 것 같다. 고교시절을 떠올리면 아름다운 추억이라기보다는 '삭막함'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르는데, 한문 선생님에게서 받은 좋은 기억도 간직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짧은 기간 동안 수업을 들은 데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 성함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선생님 수업을 계기로 한문 실력이 많이 늘었다. 그 덕에 직장 생활하면서 법률서적을 볼 때나 업무를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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