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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건기 May 27. 2024

마녀 배달부 키키

가끔 우울하기도 하지만, 나는 괜찮습니다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남들이 꽤 선망하는 직업인 '의사'가 된, 그것도 누구나 엄청난 돈을 벌 것처럼 생각하는 강남 한복판의 '다이어트' 전문 의원 대표원장인 나를 보는 사람들은 잘 상상이 안되겠지만 나는 별로 평탄한 길을 걸어온 사람이 못된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 학원을 다니던, 그마저도 원하는 대학에 닿지 못해 세번째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을 안다면 누구라도 수긍하겠지만 말이다.




 마녀는 13살이 되면 자립해서 수행을 떠나야 한다. 2007년 국내에 개봉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1989년 작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마녀 배달부 키키>의 이 설정은 내게 꽤 깊은 인상을 주었다. 20살이 되어 고향을 떠나 처음 홀로 서야 했던 내게 키키가 떠나는 마녀 수행의 길은 차라리 아름다워 보였기에, 그러나 그 길이 즐거운 일만 가득하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더 그랬었다.



 고3 수험생 시절, 고향 경산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를 하며 나는 내가 원하는 의과 대학에 한번에 합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래서 수시 원서는 쓰지도 않았고, 정시는 결국 모두 떨어져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자존감이 낮아졌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 시절 나는 패기, 혹은 무모한 자신감 같은 것이 넘치는 상태로 '모 아니면 도' 같은 심정으로 수능, 즉 정시에 승부를 걸었고 속으로 늘 이렇게 되뇌었다.


"내가 원하는 대학에 못 드갈(들어갈) 바에야, 원서는 그냥 날려서 쓰자. 내신은 안좋으니 수시는 포기하고 정시에 올인하자. 실패해도 나는 계속 나아갈 거니까. 현실에 좌절하고 멈춰서지 말자."




 저렇게 하고 한번에 원하는 대학에 철썩 같이 붙었다면 더 멋질텐데, 아쉽게도 그렇지는 못했다.



 다시 <마녀 배달부 키키>로 돌아가서, 키키는 마녀이긴 하지만 빗자루를 타고 나는 것 외에는 다른 특기가 없었다. 키키의 엄마 고키리처럼 마을 사람들을 위한 약을 만들지도, 마녀 수행을 떠나며 하늘에서 만난 선배 마녀처럼 점을 칠 수도 없는 키키를 부모님을 걱정하지만, 아버지의 라디오로 날씨 소식을 듣던 키키는 스스로 수행을 떠나는 날을 오늘로 정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부모님의 환송을 받으며 떠난 키키는, 늘 그렇듯 틀린 일기예보 때문에 좀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드는 마을을 발견한다.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처음 서울로 상경했을 때, 나도 이 서울이 꽤 마음에 들었다. 지하철도 신기했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뭔가 다들 사회의 중요한 역할을 해내는 대단한 어른들처럼 보였다. 곧바로 재수학원에서 입시를 준비해야했기에 별로 많이 구경을 다니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서울이 참 좋았다.


 그러나 새로운 마을에서 처음에는 별로 환영 받지 못하던 마녀 키키처럼, 나의 첫 서울 생활 역시 막상 즐거운 일로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재수학원 특유의 삭막한 공기, 시골에서는 상상도 못해본 좁은 방, 그리고 부실한 식사와 다 같이 공부하던 고향 친구들이 아닌 전국에서 모인 낯선 경쟁자들과 부딪히며 그들보다 좋은 성과를 내야한다는 압박감까지, 그 시절 나는 만약 정말로 내가 '혼자'였다면 견디지 쉽지 않았을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다행히 나에게는 아버지, 그리고 친구들이 있었다. 아버지와 매일 통화를 하며 오늘 있었던 일, 내일 할 일,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와 같은 것들을 이야기했고 그 전화를 끊고 나서야 하루를 정리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서울로 함께 상경해 대학생이 된 친구들은 내가 혹시라도 우울해 하거나 힘들까봐 전화는 물론 가끔 저녁을 사주며 응원해줬고, 공부하면서 겪는 고민과 미래에 대한 불안에 대해 공감해주며 내가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힘을 주었다.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는 키키가 어느날 갑자기 마녀의 능력이 약해져 더 이상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 수 없게 되고 파트너인 검은 고양이 지지의 말도 알아 들을 수 없게 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키키는 친구인 톰보가 비행선에 매달려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친구를 구하려는 마음으로 마녀의 능력을 되찾고 그동안 새로운 마을에서 키키에게 힘이 되어준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하늘로 날아올라 톰보를 구해낸다.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것밖에 능력이 없던 키키처럼, 나에게는 포기하지 않고 성실하게 앞으로 나가는 것 외에는 특별한 재능이 없었다. 그리고 키키가 그랬듯 내가 그 능력을 포기하고 멈추려는 마음이 들 수도 있던 순간들마다  아버지와 친구들은 마치 함께 있는 것처럼 여전히 나를 좌절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성장해 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마을에서 훌륭한 '마녀 배달부'가 된 키키처럼 낯선 서울에서의 1년을 보내고 원하던 의과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라고 멋지게 끝내고 싶지만, 아쉽게도 나는 이번에도 원하는 대학교 까지는 닿지 못했다. 하지만 낯선 서울에서의 1년을 통해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얻어냈고, 또 다시 수능을 준비하며 찾아낸 나만의 방법인 매일 스톱워치로 하루 13시간의 순공(순수한 공부 시간을 뜻하는, 당시 유행했던 말)을 채운다는 결심을 지켜내 세번째 입시에서는 드디어 원하는 대학의 의대생이 될 수 있었다.


 어떤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내가 가진 최고의 능력, 그리고 그 길을 함께 걸으며 성장해나가는 좋은 친구과 가족들이 드디어 나를 목표에 닿을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이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다이어트' 전문 의사로 일하는 것은 어쩌면 그 낮선 서울에 스스로의 목표에 대한 결심을 가지고 상경한 또다른 나를 매일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결심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길이 조금이라도 수월해질 수 있게 돕고, 나처럼 몇번의 실패를 겪었더라도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도록 함께 해주는 것, 그것이 내가 나를 찾아온 이들에게 내가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또다른 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의사, 조력자, 그리고 친구가 되어주는 것만이 지금까지도 나의 친구, 조력자, 가족으로 내가 성장해나갈 수 있도록 함께 해주는 이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일일테니까.


가끔 우울하기도 하지만, 나는 괜찮습니다.

1989, 지브리 스튜디오, <마녀 배달부 키키>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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