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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건기 May 20. 2024

이웃집 토토로

경산 시골 소년, 강남 의사가 되다

 지금도 그렇지만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은 내가 자랄 때는 정말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1시간 남짓이면 읍내를 한 바퀴 돌아볼 수 있을만큼 아담한 마을은 초등학교 때 만난 친구들과 고등학교 시절까지 함께 보낼만큼 또래라고 부를만한 아이들이 적었고, 그래서 친구들과는 경쟁자라기보다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동무로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1988년 작이지만 국내 개봉은 2001년이었던, 초등학교 시절에 처음 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는 그래서 내게 꽤나 친숙한 이야기였다. 수풀이 우거진 작은 시골 마을의 풍경, 망가진 우산이나마 친구를 위해 내어주는 순수한 아이들, 무뚝뚝해 보이지만 아이들을 진심으로 좋아해주는 이웃집 할머니, 버스 정류장에서 우산을 들고 아버지를 기다리는 나, 이런 장면들은 내게 애니메이션 영화속의 이야기가 아닌 일상 그 자체였으니까.




 영화에서 동생 메이가 아픈 엄마가 걱정돼 혼자 병원으로 길을 떠났다가 사라졌을 때, 동네 사람들 전부가 아이를 찾기 위해 나서고 언니 사츠케가 토토로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그리고 토토로가 불러준 고양이 버스가 메이가 있는 곳으로 사츠케를 데려다주고 아이들을 병원까지 데려가 엄마를 보여줘 안심 시켜줬을 때, 그 모든 이야기들이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우리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져 너무 좋았다. 그래서였던 것 같다. 내가 그 후로도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꼭 챙겨보게 된 것은.



 이웃집에 토토로가 살지는 않았지만, 동네 뒷산의 숲을 오르다보면 왠지 토토로를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은 동네에서 우리는 그렇게 <이웃집 토토로>에서 처럼 마을 전체가 함께 키우는 아이들이었다. 온동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꿈을 키웠고, 어른에 가까워져 갔다. 그리고 우리가 자란 마을은 작았지만 우리의 꿈은 절대 작지 않았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나와 친구들은 모여서 함께 놀던 시간의 대부분을 모여서 함께 공부하는 시간으로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그 시골에 서울처럼 대단한 학원이 있을리 없었지만 다행히 우리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에는 '인터넷 강의'라는 새로운 기회가 열렸고 우리는 소위 '일타 강사'라고 불리는 서울의 유명 강사들이 진행하는 강의를 각자 과목을 나눠 교재와 함께 구매해 다같이 공부할 수 있었다.


 그때 우리는 서로 이겨야만 하는 '경쟁자'가 아닌 서로의 '꿈'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친구이자 동료였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나의 꿈은 의사였다. 초, 중, 고 생활 기록부를 보면 매번 빠짐없이 나와 부모님 모두 희망 직업란에 '의사'라고 기재해뒀을만큼 확고한 꿈이었지만 사실 그때까지는 그냥 부모님이 심어준 목표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돌잔치 때 청진기를 잡았다는 부모님 말씀에도 아마 그렇게 되도록 조종하셨을 거라는 실없는 상상만 했었으니까.


 내가 진심으로 '의사'라는 꿈에 대해 결심하게 된 이유는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고등학교 시절 봤던 지성, 김민정 주연의 MBC 의학 드라마 <뉴하트> 때문이었다. 흉부외과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일상과 사랑을 다룬 이 드라마는 내가 몇년 간 돌려볼 정도로 좋아하는 드라마였다. 그리고 사춘기였던 내게는 매일 밤을 지새며 환자를 위해 동고동락하는 동료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그들의 연애가 너무나도 멋지게 느껴졌다.




 그들의 멋진 연애와 일상을 드라마로 접하며 어른들이 늘 말씀하시던 '대학만 잘 가면', '의사라는 야무진 꿈'이라는 말이 정말 이루고 싶은 목표로 바뀌었고 그것이 동기부여가 되었기에 고등학교 시절 내내 친구들과 함께 서로의 꿈을 응원하며 지치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들 말 잘 듣는 순진한 학생들이었기에 이따금씩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학교를 빠져나가 떡볶이를 먹고 노래방을 가는 정도의 일탈에도 엄청난 비법적인 행동을 한 것 마냥 양심의 가책을 느낄 정도였던 우리는 어긋나지 않고 함께 공부한 덕에 결국 고등학교 3년이 지나고 다같이 서울로 상경할 수 있었다.


 나는 비록 입시에서 원하는 학교에 닿지 못해 재수를 준비하러 올라온 것이었지만 이후에는 목표를 이루었고, 어쨌든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고향 마을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로의 꿈을 응원하며 함께 성장하고 있다.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의 작은 마을, 그 읍내에서 함께 뛰놀고 공부하며 서로에게 때로는 자극이 되어주기도, 힘이 되어주기도 하던 우리는 이제 어엿한 사회인으로 서울 한복판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끔 고향에 갈 때면, 친구들과 둘러 앉아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수풀이 우거진 작은 시골 마을의 풍경, 망가진 우산이나마 친구를 위해 내어주는 순수한 아이들, 무뚝뚝해 보이지만 아이들을 진심으로 좋아해주는 이웃집 할머니, 버스 정류장에서 우산을 들고 아버지를 기다리는 나, 그리고 토토로. 그때 우리는 서로에게 모두 사츠케와 메이의 어려움을 함께 해주는 토토로가 아니었을까. 강남 한복판 빌딩 숲의 의사가 된 지금까지도 함께 해주는 토토로들에게 늘 고마움과 변하지 않을 우정을 바친다.



꿈이었는데, 꿈이 아니었다.

1988, 지브리 스튜디오, <이웃집 토토로>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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