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리고 나의 아버지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대부분 그렇겠지만, 내가 아직 소년일 때 나에게 아버지는 거의 나의 전부였다. 첫 화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는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한 시간 정도면 읍내를 전부 돌아볼 수 있는 그 작은 마을을 나는 거의 매일 아버지와 함께 걸었다.
'꿈'이란 뭘까. 어떤 이들은 그것이 '목표'와는 다르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의사라는 직업은 목표는 될 수 있지만 꿈이 아니야. 의사로서 뭘 이루고 싶은지에 대한 꿈을 정해야해."
좋은 말이다. 좋은 말이긴 하지만 이런 걸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어린 아이에게 강요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내가 매일 아버지와 길을 걷던 그 20세기와 21세기의 교차점을 보내던 시절에는 저런 '꿈'을 가지는 것에 대한 강요가 꽤나 멋진 일처럼 여겨졌던 것 같다. 많은 어른들, 책들, 텔레비전에 나오는 성공한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소년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하던 시절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게 적어도 저런 추상적인 질문을 구체적으로 대답하라고 강요하는 분은 아니셨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1995년 작, 국내 개봉은 2007년 연말이었던 애니메이션 영화 <귀를 기울이면>의 주인공 츠키시마 시즈쿠는 '꿈'에 대한 스트레스를 꽤 많이 받는 중학생 소녀이다. 가족들에겐 어떤 목표도 의욕도 없이 그저 흘러가는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 걱정의 대상이 되는 그녀는, 사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노래 가사를 번역하며 자신의 스타일을 가미할 정도로 재능을 가진 문학 소녀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는 어느날 도서관에서 빌린 책의 대출 카드(책을 빌려간 사람의 이름과 출납 기록을 적은 장부 같은 것)에서 자신이 읽은 책을 거의 항상 먼저 읽는 아마사와 세이지라는 사람의 이름을 발견하고 호기심을 갖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기는 하지만, 사실 아마사와 세이지는 시즈쿠가 번역해 개사한 노래의 '콘크리트 로드'라는 가사를 우연히 읽고 비웃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소년이었다. 시즈쿠의 입장에선 세이지의 정체가 좀 실망스러웠을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우연히 지하철에서 만난 고양이를 따라가다가 세이지의 할아버지 니시 시로가 운영하는 골동품 가게 '지구옥'에 들어가게 된 시즈쿠는 가게에서 본 고양이 남작 인형 '바론'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게에 다시 들렀다가 아마사와 세이지의 정체를 알게 되고, 세이지가 그 골동품 가게 주인 할아버지의 손자인 것도 알게 된다. 그리고 세이지가 바이올린 제작 장인이라는 꿈을 위해 이탈리아 유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진심으로 감탄한다. 여기서 세이지가 말한다.
"너는 글 쓰기에 소질이 있어."
이 말에 용기를 얻은 것인지, 꿈을 향해 달려가는 세이지를 보고 자극 받은 것인지 시즈쿠는 영화의 제목과 같은 <귀를 기울이면>이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내 꿈은,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장래희망'이자 어린 시절의 목표는 '의사'였다. 부모님에 의해 정해진 목표이기도 했고, 그렇지만 내게도 꽤나 마음에 드는 목표이기도 했던 그 '의사'라는 목표 때문이었는지 아버지는 내 성적에 대해 꽤 예민하신 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옛날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폭력을 쓰거나, 직접 붙잡고 공부를 시키거나 하시는 분은 다행히 아니었지만, '목표'를 벗어나는 일을 용납하지 않는 분이었다. 이를테면 어렸을 때 <따끈따끈 베이커리>라는 TV 애니메이션을 보고 갑자기 '제빵사'가 되고 싶다는 새로운 꿈이 생겨 부모님과 '전교 1등을 하면 제빵 도구를 사주겠다.'라는 약속을 하고 지켜내어 한창 제빵에 빠져 공부는 소홀히 하기 시작하자 아버지가 나에게 부엌 출입을 금지 시키고 제빵 도구를 치워버리셨던 적도 있을 정도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면서도 나는 여전히 아버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아버지와 나누는 이야기들은 점점 가까워져 가는 '입시'라는 미래에 대한 고민이 주제가 되었고, 의과대학 진학이라는 '목표'를 향해 오늘 한 일, 내일 할 일에 대한 것들을 모두 공유했다.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들은 내가 '목표'를 잃지 않는데 있어 가장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도 장편 소설을 쓴다는 것은 톨스토이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처럼 엄청난 시간과 체력이 필요한 일이다. <귀는 기울이면>을 쓰기 시작한 시즈쿠 역시 학업을 저버리고 글쓰기에만 몰두해야만 했고, 당연히 학교 성적이 100등이나, 그러니까 전교생 276명 중 50등 정도이던 시즈쿠가 153등이 되었을 정도로 떨어졌다.
걱정이 된 가족들과 다투기도 했지만 결국 시즈쿠가 글을 완성할 수 있도록 믿어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리고 완성된 글을 세이지의 할아버지 시로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는데, 잘 읽었다는 그의 칭찬에도 시즈쿠는 본인의 부족함을 알기에 울음을 터뜨린다. 이후 시로의 격려와 위로를 받은 그녀는 훗날 더 좋은 글을 쓰는 날을 기약하며 시험 공부에 다시 몰두한다. 시즈쿠는 아버지와 시로 할아버지, 그리고 세이지를 통해 자신의 '목표'인 소설가를 포기하지 않은 채 더 발전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목표'를 잃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은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또 본인 스스로의 의지, 결단, 그리고 노력이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다행히도 <귀를 기울이면>의 주인공 시즈쿠에게 세이지와 시로, 그리고 아버지가 있었던 것처럼 내게는 매일 대화를 나누며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아버지가 있었다.
'목표'에 닿고, '꿈'을 그리며 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지금의 나는 그래서 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의 아버지와 같은 동반자가 되어주려 한다. 고민을 나누고 두려움을 고백하고, 목표를 함께 하는 사람. 그것이 내가 의사로서 꾸는 새로운 '꿈'이니까.
君の人生の話を素敵に書いてみなさい。
네 인생 이야기를 멋지게 써보렴.
1995, 지브리 스튜디오, <귀를 기울이면>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