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No Harm
1986년 작, 국내에는 2004년 개봉했던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영화 <천공의 성 라퓨타>는 영화가 시작한 뒤 몇 분을 대사 없는 배경과 인물들의 움직임으로만 표현한다. 하늘을 무대로 하는 해적단 '도라 일가'가 영화의 여주인공 시타가 탄 비행선을 습격하면서 시작되는 그 장면들은 대사가 없어도, 심지어 소리조차 거의 나지 않아도 욕망에 사로잡힌 해적단과 그들이 훔치려는 물건을 지닌 소녀의 감정과 긴박한 상황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Do No Harm.' 의사라면 누구나 하게 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기본 원칙이자 핵심이기도 한 이 말은 '환자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할 당시에도, 지금도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의사로서의 신념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이다. 이 말을 지키기 위해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조금 답답할 수도 있겠지만 환자에게 가장 부작용이 적은, 가장 덜 아픈, 그리고 가장 회복 기간이 짧은 치료 방법을 우선 시 하고 있다.
아마도 다이어트가 고민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목표를 정하고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고통을 견디지 못해 실패하는 과정을 겪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더 강한 의지', '더 많은 노력' 같은 게 없었다고 단순히 비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이어트', 즉 비만 치료는 일반적으로 그 과정이 짧을수록, 효과가 극적일수록 그 대상이 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더 많은 부작용, 더 큰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이들에게 의사는 더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다양한 방법'이라는 것은 보통 과정이 짧고, 효과가 극적이기에 그것을 시행하는 의사에게 더 큰 명성과 부를 가져다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것들보다는 나를 찾아온 환자가 가진 '목표'에 끝까지 동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천공의 성 라퓨타>의 또 다른 주인공, 비행선에서 떨어진 시타를 구해주고 그녀에게 반한 소년 파즈는 라퓨타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었던 아버지가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다 돌아가신 일로 인해 직접 비행기를 만들어 라퓨타를 찾겠다는 목표를 가진 아이이다. 그러나 그는 시타를 진심으로 좋아했기에, 군대에 잡혀간 시타의 부탁으로 라퓨타를 포기하려고도 하고 또 다시 그녀를 구해내 고향인 라퓨타를 함께 찾으러 나서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파즈는 시타의 고향인 라퓨타를 함께 찾아 나서는 동반자이자, 자신의 목표인 라퓨타를 그녀를 위해 포기할 수도 있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위하는 소년이다.
몇번의 죽을 위기를 넘기고 드디어 천신만고 끝에 찾은 라퓨타, 그러나 자신들을 쫒아온 군인 중 라퓨타의 후손인 무스카의 야망으로 인해 라퓨타가 그의 왕국이 될 위기를 맞자 파즈는 시타와 라퓨타를 구하기 위해 '아버지의 거짓말쟁이라는 오명을 씻기 위한' 유일한 증거인 라퓨타를 붕괴 시키는 멸망의 주문인 바루스를 시타와 함께 외운다.
라퓨타를 부활 시키고 왕이 되려는 야망을 가진 무스카는 물론이고, 처음엔 악연이었지만 결국 여행을 함께 하고 서로를 구해준 해적단 도라 일가 역시 보물을 챙기려는 각자의 '목표'를 위해 움직였지만 파즈는 이미 시타의 고향인 라퓨타로 가는 길을 함께 하는 일을 완수했기에, 시타가 더 이상 고통 받지 않도록 자신의 목표를 포기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Do No Harm."
어쩌면 시타에게 파즈는 이 말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준 것이 아닐까.
거창하게 신념, 동행 같은 이야기만 했지만 사실 내가 환자에게 힘들고 아픈 시술을 하는 것을 지향하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그런 시술을 잘 못견디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조차 견디기 힘든 시술을 환자에게 하는 것은 나까지 아픈 기분이 들어서 별로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환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최소한의 고통과 부작용으로 나를 찾아온 이들의 '목표'를 향하는 길의 끝까지 함께 하는 것, 내가 의사로서 가진 신념은 어쩌면 당연하고 평범한 별로 멋지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천공의 섬 라퓨타>에서 파즈가 시타에게 그렇게 한 것처럼, 나를 만난 사람들에게 나의 목적이나 목표가 아닌 그의 '목표'를 위해서 진심으로 함께 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것이 나라는 사람이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