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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웃렛 May 28. 2024

‘아파트청약’과 ‘딸기스무디‘

옹졸하디 옹졸하고 옹졸한

“축하합니다.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셨습니다.”

점심시간 구내식당에서 문자를 받았다. 분양가 6억 원가량의 아파트 청약에 당첨됐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이런 행운이 따라올 줄이야! 그래, 그동안 뭐가 너무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내 고단한 생활에 대한 보상인 셈이다.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가 곧장 다시 ‘걱정’이란 녀석이 나만 두고 어딜 가냐며 내달려서 나를 따라왔다. 분양가 때문이다. 식사를 깨작대며 대충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다. 내가 가진 것과 손을 벌려야 하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른 이자 말이다. 가볍게 두드려 본 계산기에서 믿을 수 없는 숫자를 보고 헛웃음이 지어졌는데, 삼순三旬을 구식九食하고도 모자랄 판이다. 그래, 아홉 끼가 뭐야, 빌어먹어도 내 집이 있다면야 행복할지도 모르지. 평면도와 주변 인프라, 출퇴근 ‘여정’을 살펴보았다. 열두 평 남짓 “쁘띠(petit)한 내 집”에서부터 사무실까지, 나의 통근길은 줄곧 서울여행이 될 게 뻔했고, 이제는 또 다른 유형의 ‘슬픔’이란 녀석이 나도 함께 가자며 어깨동무를 해왔다. 아직 계약을 진행하지도 않았고, 대출을 발생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나에게는 벌써 ‘걱정’과 ‘슬픔’이라는 친구 둘이 생겨버렸다. 인간의 상상력은 어디까지인지, 청약에 당첨됐다는 문자 하나에 나는 향후 십몇 년을 미리서 고통스러워했다.


옆 자리 다른 팀원들이 식판을 비워갈 때쯤이면, 평소처럼 나는 ‘알아서’, ‘눈치껏’ 수저를 내려놓는다. 딱히 눈치를 주는 사람들은 없지만, 그냥 내가 그 호흡에 맞추는 게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드르그르르르르르” 오금으로 구내식당 의자를 밀어내며 일어났다. 늘 하던 대로 퇴식구에 식기를 반납하고 나면, 한 박자 쉬고, “저는 남는 번호요.”라고 조용히 외쳐본다. 점심 식사 후에 우리 팀원들은 룰렛으로 커피내기를 하기 때문이다. 청약에 당첨된 그날, 나는 운이 몹시 좋았다. 룰렛마저도 당첨됐기 때문이다. 룰렛 따위에 내 행운을 써버리기 전에 복권을 샀어야 했다는 생각이 잠시간 스쳤다. 나는 길흉화복을 비는 기독교인이라는 점에서, 스스로가 깜찍하다.


카페에 도착해서 주문을 하려고 카운터에 섰다. 각종 커피메뉴가 다 튀어나왔다. 계중에 “딸기스무디 하나요.”라는 뜨겁고 큼지막한 목소리가 귀에 날아와 꽂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보다 2500원 비싼 딸기스무디라는 단어 하나에, 나도 왠지 강아지들처럼 귀가 쫑긋쫑긋 움직이는 듯했다. 다시 한번 상기해 보자면, 나는 아직 청약 계약을 진행시키지도 않았고, 은행 창구에서 대출플랜을 짜지도 않은 상태이다. 그저 당첨 문자 하나만 달랑 받아두었다.


무작위를 원칙으로 하는 룰렛 덕분에, 카페 비용은 다달이 비슷한 수준으로 나가곤 한다. 이것은 굳이 계산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확률(probability)의 법칙이다. 때문에 점심시간 룰렛에 걸려도 그렇게 안타깝거나 분하지는 않다. 어차피 확률은 확률이니까. 오히려 내가 살 차례가 왔을 때에 마음껏 드시라고 하는 편이 나의 사회생활에 유리한 법.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누가 감히 내 판에서 ”딸기스무디“를 시켰냐는 거다. 아까 잠깐 스쳐 지나간 믿을 수 없는 계산기 숫자 덕분인지, 뜨겁고 큼지막했던 딸기스무디는 이제 내 머릿속에서 새벽녘 열기구로 변했다. 서늘한 콧김에도 불구하고 머리는 뜨거워졌다. ‘딸기스무디’라는 단어는 나의 옹졸함을 배가하면서 둥둥 잘도 떠올랐다. 누구야, 딸기스무디…


이럴 때면 내가 기독교인인 것이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불자였다면 또다시 수행의 길로 나를 보내주어야겠지만, 나는 인내심이 부족한 편이다. 이런 나의 옹졸하디 옹졸하고 옹졸한 스스로를 마주할 때면, 내 연약함을 그리스도께 돌려드리는 게 속이 편하다. 딸기스무디 그 맛있는 아이가 무어라고 사람을 다 미워한담. (와.. 나에게도 이런 돈오頓悟의 순간이 있을 줄이야!) 딸기스무디 하나 아낀다고 해서 6억을 갚는 데에 큰 힘이 되진 않을 텐데도, 돈 앞에서 사람이 참 옹졸해진다. 외할머니께서 하시던 말씀이 기억난다. 돈이 달래 좋은 게 아니라고. 돈은 딸기스무디도 살 수 있게 해 주고 아파트도 계약할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돈의 가장 좋은 점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준다는 데에 있다. 만약 내가 삼순구식하며 천 원 한 장까지 긁어모아 아파트 청약금을 마련하는 중이었다면 딸기스무디를 시킨 그 팀원을 가격했을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상상력은 돈이 들지 않는다는 큰 장점이 있다. 다행이다, 딸기스무디가 6억이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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