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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웃렛 Jun 02. 2024

‘보들레르 마들렌’의 실질사례

나는 단연코 고등어구이보다 삼치구이를 사랑한다.

내 생일은 5월 8일 어버이날이다. 어버이날은 공휴일이 아닌 터라, 모든 일정을 마친 후에나 외할머니댁으로 갔다. 외가식구들이랑 간단하게 케이크 초에 불을 붙이고 노래를 부르고 축하 파티까지만 간단하게 한 뒤 쓰러져 잤다. 늘어지게 자고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내가 사랑하는 불고기에 삼치구이에 각종 나물 반찬에 옛날 사라다 반찬에 그야말로 밥 다운 밥을 먹고 나니 할매 집에 온 게 실감이 났다.

밥을 먹고 거실 소파로 가서 “테레비”를 봤다. short-form 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제대로 (설치)된” 다리가 달려있는 TV를 통해서 공중파 방송을 보고 있자니 호흡이 느려터진 것이, 도파민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듯했다. 더 재미난 걸 찾아야 했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할매가 테레비 보는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내 종아리를 조물조물하면서 혼잣말을 하고 있다. 중얼중얼의 내용인즉슨, 대략, 이 이쁜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를 보기만 하기엔 아깝더랬다가, 낭군님은 언제 데랴오려나 하다가, 평소에 쌀밥을 못 먹고 다녀서 이렇게 마른 거냐 하다가, 같은 서울인데 밥 먹으러 자주 오랬다가, 뭐 기타 등등의 초기 치매 할머니의 생각의 흐름에 따른 넋두리다. 이제야 나는 도파민 증폭을 위한 사냥감을 찾았다. 할매한테 과일 좀 깎아오라고 했다.

할매가 느릿느릿 뒤뚱뒤뚱 부엌으로 찬찬히 간다. 그래도 열심히 잘 걸어가는 걸 지켜보자니 너무 기특하다. 할매가 놀라지 않게 살금살금 뒤따라 가선 할매가 꺼낸 사과랑 멜론이랑 과도를 뺏어 들고, “됐어, 내가 할게, 가 있어.” 하면 할매는 또다시 걷기 운동을 하며 소파로 돌아간다. 할매랑 달다구리 과일을 먹고 나면 배가 한참은 더 불러오는데, 이 공간에선 나의 체면 따위는 없으므로, 윗도리를 뒤집어까서 할매한테 과년한 처자의 불룩한 배를 보여준다. 그러면 할매가 엄청 좋아한다. 배부르게 잘 먹었단다.

배가 부르니 에너지 버닝이 필요하다. 할매를 살짝살짝 건드려가며 귀찮게 하다 보면 할매가 최근에 얼마나 힘이 빠졌는가를 알 수가 있다. 휴, 이제는 할매한텐 힘을 좀 덜 써야겠다.


소파에서 빈둥빈둥하다가 차마 내 손으로는 목욕하기가 귀찮아서 근처 미용실을 찾아봤다. 아파트 단지에 있는 옛날 상가 건물 2층에 위치한 작은 미용실이 있다? 샴푸가 무려 5000원? 산책 좀 하고 오겠다며, 세수만 하고 바로 집을 나섰다.

상가 건물 2층으로 올라가는 길에, 피아노 학원에서 어떤 어린이가 소나타 모음집 연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훅 정겨워졌다. 요런 게, 고상하게 말하자면, 보들레르의 마들렌 같은 거구나. 누구나 어릴 적 자주 듣던 소리를 편안해한다는 게 이해가 됐다. 어린 시절을 아파트 단지에서만 보냈던 나는, 태권도 학원에서 들려오는 어린이들의 기합 소리, 피아노 학원에서 들려오는 멜로디,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어린이들 자지러지는 소리, 그런 것들에 편안함을 느끼나 보다.

미용실에 들어섰다. “한스헤어뱅크”. 한 어르신께서 머리를 깎고 계셨다. 미용사는 흰머리가 희끗한 아주머님이셨다. 문득 두려워졌다. 진짜 샴푸만 하고 물 뚝뚝 흘리면서 집에 가라고 하면 어떡하지? 생각하던 차, 앞에 어르신이 머리를 다 끝내고 내 차례가 왔다. 샴푸 베드가 엄청 높았다. 나를 거의 거꾸로 박아 놓는 듯한 옛날 의자였다. 최근 가본 여느 미용실에서보다 더욱 박박 내 두피를 빨아 주셨다. 그것도 두 번이나. 샴푸가 끝난 뒤 물기를 제거하고 드디어 드라이어를 집어 드셨다. 안도감이 몰려왔는지 졸음이 솔솔 밀려왔다. 드라이어 팬 소리 너머로 옆 건물에서 공사하는 소리가 베어 들려왔다. 그래, 나의 현재 주거지에는 항상 밤에 있었으니까 낮에 공사하는 소리를 들을 일이 없었겠다. 공사는 늘 낮에 하니까. 머리를 어느 정도 말리고 나니 어깨에 둘러주신 수건을 치우셨다. 끝났다는 말이다. 스타일링은 사치요, 머리를 바싹 말려 주시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여긴 미용실이 아니라 ‘헤어뱅크’니까. 그래도 물을 뚝뚝 흘리면서 집에 가지 않을 정도로는 머리를 말려 주셔서 몹시 다행이다. 머리 감기가 귀찮아서 미용실 가서 머리 감고 온다는 말을 채 하지 못하고 나왔는데, 물기를 짜내면서 집에 들어가면 할매한테서 한소리 들을 게 뻔했으니까.


계산을 하고 상가 건물을 나왔다. 옛날 건축마감재에서 뿜어져 나오는 세월의 냄새가 기분이 좋았다. 수십 번도 더 바뀌었을 입점 점포 안내도에서 굳건히 옛 서체를 유지하고 있는 한스헤어뱅크 사인이 새삼 대단하고 멋있다고 생각했다. 반건조 머리카락 사이로 부는 자연바람이 상쾌했다. 머리를 털어 말리면서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를 구경 갔다.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들이 먹는 건 똑같다. 집자마자 엄마가 안된다고 하는 거, 조건부로나 먹을 수 있는 거. 나른한 분위기에 한껏 취해서 아이스크림을 한 아름 사 갖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안 그러면 아이스크림 다섯 개씩 까먹고 배아야 하면 할매가 배문질을 해줘야 하는데, 힘 빠진 할매의 수고로움은 덜어줘야 한다. 들어가서 할매랑 어제 냉장고에 넣어 둔 케이크나 마저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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