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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웃렛 Jun 13. 2024

잘 익은 바나나 고르는 법

시각의 불완전성

내가 산 바나나는, 아랫것이 물러있거나, 껍데기를 벗겨보면 덜 익은 풀내가 나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달지 않다. 바나나를 잘 고르려면 신중함과 더불어 선견지명이 필요하다. 과일은 한 번 집으면 다시 내려놓으면 안 되니까, 어떤 송이를 살 것인지 ‘단번에’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보관이 쉽지 못한 탓에 향후 며칠 안에 바나나를 소진할 수 있는지 헤아려볼 수도 있어야 한다. 내가 바나나를 고르기 위해 두 가지 요소를 중요시하는 것은, 단 한 번도 이 둘을 충족시킨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실패의 원인을 찬찬히 살펴보자면 이렇다.

먼저, ‘신중함’ 부문을 해하는 것이 있다면, 여기 진열돼 있는 모든 바나나 중 내가 가장 ’실한 놈‘을 찾고야 말겠다는 욕심에 비해 두드러지는 우유부단함이다. 가장 좋은 것을 갖고 싶다는 욕심만 가득하다면 신중함 요소에 잘 부합하겠지만, 여기에 우유부단함이 곁들여지면 뭐가 뭔지 몰라서 결국 아무거나 집어드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신중함과 우유부단함이 한 끗 차이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중한 것인지 우유부단한 것인지는 늘 결과론적으로나 해석되는 덕목이라는 것이다. 결과가 좋으면 신중한 사람이고, 결과나 나쁘면 우유부단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이 둘의 공통점은 모두 잘 익은 바나나를 고르고 싶은 ‘욕심‘이 있는 인물이다. 나의 경우에는 좋은 바나나를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우유부단한 편에 속하겠다. 다음으로,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 사람일이라고 한다지만, 바나나를 사 온 날 이후에는 꼭 밖에서 밥 먹을 일이 연달아 생긴다. 여기까지만 듣고서는, “얼른 잘라서 얼려두면 되잖아!”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그럴 거면 냉동과일을 사지 왜 생과일을 사? 향후 며칠 동안은 집밥을 먹어야 할 때 과일을 사는 법!


구구절절한 이유들 덕분에 나는 내 손으로 맛있는 바나나를 사본 적이 없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바나나 구입에 실패했으므로, 무른 것들을 골라내면서, ‘시각’이라는 감각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 생각해 본다. 어떤 한 면에서 바나나 한 손을 바라보면 정말 탐스럽다가도, 다른 한 면에서 바라보면 검게 물러터진 면이 있고, 그 중간쯤에 잘 익어 보이는 것을 먹으면 그저 시큼하다. 어쩌면 시각에 비해 미각이 훨씬 더 섬세할지도 모르겠다. 내 눈에 보이는 것조차 믿지 못할 순간이다. 따라서 시각이라는 감각은 보조적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미각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위해 필요한 보조적 수단 말이다. 그렇다면 시각이 목적이 되는 때도 있을까? 따져보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시지각은 목적이 될 수 있어도 시각은 늘 보조적 수단이다. 우리는 보통 무엇을 ‘보고 나서’ 어떠한 결정을 내리는 만큼, 시각이라는 것은 참 무서은 감각이다. 목적이 되지도 않으면서 인간의 모든 결정에 선제적으로 관여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학교에 들어갈 때쯤, 그때까지 나는 혼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본 적이 없었다. 특히 지하철은 왠지 어른의 세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무서워했던 이유는 지하철을 타 있는 동안 밖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버스는 내가 어디를 가고 있는지 내 눈으로 지켜볼 수 있는 반면, 지하철은 이동하는 동안 내가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SF소설에서처럼, 나의 목적지까지 가기 위한 여정이 어떻게 왜곡돼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컸다. 그때까지만도 내 시각에 대해 철저히 믿고 있었다는 셈이다. 내가 보고 있는 것 그 자체로, 믿을만한 사실로 여긴 것이다. 한 번은 엄마랑 같이 지하철로 광화문에 가면서 물었다. 버스는 내가 어떻게 가고 있는지 다 보이는데, 지하철은 나를 잠시 4차원의 세계(친구들 사이에서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가 큰 논쟁거리였다)로 보냈다가 광화문에 내려줘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무섭다고. 광화문에만 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길로 어떻게 갔는지도 중요한데 지하철은 그런 걸 모두 잊게 만든다고. 엄마의 대답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렇게 얘기해 놓고서 또다시 나만의 상상력에 빠져있었을 것이다. 당시 내 사고의 후반부는 이렇다. “반동난 사과 앞부분만 보고서 사과 하나라고 착각할 수 있는 것처럼, 지하철이 나를 뱅글뱅글 돌아 광화문으로 데려다주든, 버스 차창으로 본 길 그대로 광화문으로 데려다주든 진짜 상관이 없는 건가?”

결론. 투시력이 시급하다.


시각적 감각은, 늘, 뒤따르는 결과가 중요하다. 잘 익은 바나나를 골랐다고 해도 관상용으로만 두겠다면 모를까, 입에 넣어보고서 맛있다고 ‘느껴야’ 비로소 ‘잘 봤다’고 할 수가 있다. 만약 지하철이 광화문이 아니라 용산역에 데려다주었더라면, “거 봐, 어디로 가는지 볼 수도 없는 건 까딱하다간 큰일이라니까?” 생각했을 거다. ‘본다’는 행위는 대체 무엇일까? 이렇게까지 불완전한 감각인데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결정에 지배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다시 한번, 바나나 속까지 침투 가능한 투시력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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