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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전연 May 18. 2024

주온 - 비디오판 2

공포 영화의 고질적인 소포모어 징크스

1. 감상

비디오판 1편의 장르가 공포라면 2편은 코미디다. 카야코 귀신에 대한 내성이 생긴 탓인지 하나도 무섭지 않다. 재미라도 있으면 다행인데, 영화의 절반 정도가 1편과 동일하게 반복되고 특이할 만한 사건 없이 이야기가 전작과 비슷하게 전개돼서 지루함마저 든다. 1편과 2편이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이는 영화는 처음이다. 하늘과 땅 수준. 정말로 거짓말 안 하고, 주온 비디오판 2편은 밤에 집에서 혼자 불 끄고 봐도 무섭지 않다. 그만큼 1편의 아성에 먹을 칠하는 졸작이다.

주온의 자매 격인 그루지(The Grudge) 시리즈도 2편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공포가 코미디로 변질된 것인데, 나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 귀신이나 괴물을 출몰시켜 관객을 놀래는 공포 영화의 태생적 한계에 있다고 본다. 뭐든 익숙해지면 감흥이 떨어지듯이 귀신이나 괴물도 자꾸 보면 덜 무섭다. 나중에는 시시해진다. 그럴수록 감독은 공포가 무지(無知)에서 비롯한다는 속성에 착안하여 롱숏으로 공포의 대상을 넌지시 비추고 그의 정체와 관련된 사연을 최대한 감춰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공포의 대상을 미지의 존재로 만들어 공포감을 유지해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자극과 충격이 부족해서 공포감이 떨어진 것으로 오인하여 클로즈업으로 공포의 대상을 대놓고 드러내고 그의 정체와 관련된 사연을 친절하게 해설하는 우를 범한다. 결국 이런 과함과 지나침은 귀신(혹은 괴물)을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전락시키고 영화 장르까지 코미디로 변질시킨다. 공포 영화 시리즈가 갈수록 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 이상 공포가 통하지 않는 것을 아니까 급기야 마지막에는 이왕 이렇게 된 거 한탕 하고 돈이나 벌자는 심정으로 '프레디 대 제이슨' '에이리언 대 프레데터' '사다코 대 카야코'처럼 재미와 흥행만 염두에 둔, 망측한 작품에 종착한다. 잘나가던 스타가 이제 밤무대 뛰고 예능 방송 들러리 서는 것과 흡사하다.

에이리언 1편과 '블레어 윗치(The Blair Witch Project)'는 공포의 대상을 공개하지 않고 그의 정체와 관련된 사연을 해설하지 않는다. 단지 암시하고 침묵한다. 관객은 마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외계 생명체의 정체에 대해 하나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무섭고, 그래서 무섭다. 공포 영화는 이렇게 미지와 무명으로 공포심을 일으켜야 하는데 이 영화, 주온 비디오판 2편은 귀신의 노출과 정체의 공개로, 그렇게 과함과 지나침으로 오히려 공포심을 떨어뜨린다.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의자 밑에서 불쑥 나오고, 팝아트처럼 대량 생산되는(비 오는 교정에서 카야코 여럿이 꺼어어 소리를 내는 모습) 카야코는 무섭기는커녕 우스꽝스럽고 가엽다. 학교에서 노부유키를 쫓을 때는 사족보행(四足步行)까지 선보이는데, 그 모습이 1편 마지막에 피칠갑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과 다르게 매우 없어 보인다. 본인이 공포 영화 캐릭터라는 사실을 망각한 듯하다. 마룻바닥에 얼굴만 내놓고 고양이 울음을 내는 토시오는 정말 귀엽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는 무서운 장면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2. 줄거리

쿄코 편에서 노부유키가 혼자 텔레비전을 볼 때 화면이 깨지고 등 뒤에 귀신의 손이 나타나는데, 그 귀신은 손톱의 길이로 보아 카야코가 맞다.

그 장소가 고바야시 선생의 아내 마나미가 카야코의 남편 타케오에게 살해당한 아파트라서, 혹은 쿄코가 노부유키가 괜찮은지 확인하러 들렀을 때 이웃집 아줌마가 그 집에서 아이의 울음과 여자(마나미)의 비명이 들렸다고 해서 노부유키 등 뒤에 손 올리며 나타난 귀신이 마나미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손톱의 길이가 긴 것으로 보아 (감독이 손톱의 길이까지 신경 써서 연출했다면) 그 귀신은 카야코라고 봄이 옳다. 마나미는 손톱이 짧고 카야코는 길기 때문이다.

마나미가 퇴근한 남편과 대화를 나누며 요거트를 떠먹는 장면에서 보면 그녀의 손톱이 짧고 단정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에, 카야코가 노부유키가 있는 교실에 침입하려고 유리창을 손바닥으로 치고 여는 장면을 보면 손톱이 긴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노부유키가 혼자 텔레비전 볼 때 등 뒤에 나타난 귀신은 카야코가 맞다. 종국에 노부유키를 괴롭히고 다른 등장인물을 죽음으로 이끄는 귀신도 카야코이므로 등 뒤에 나타난 손의 주인이 카야코라고 해석함이 내용상 옳다. 마나미 귀신이 노부유키 등 뒤에 나타난 것이라면 그녀의 남편 고바야시 선생의 귀신도 어디쯤 나타나야 하고 1편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다른 등장인물의 귀신도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영화에 출몰하는 모든 귀신은 (토시오와 함께) 카야코라고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

쿄코는 오빠(부동산 중개업자 타츠야)와 한 전화 통화에서 노부유키가 요즘 이상하다는 얘기를 듣고 그의 상태를 확인하러 그들 부자가 사는 아파트를 방문하는데, 그 집에 들어서자마자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목판에 붙은 부적 같은 것을 확인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은 가미다나(神棚)에 사용된 신부(神符)로서,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집 안에 소형 신사를 만들어 부적을 붙이거나 위패를 안치하는 풍습이 있다.

키타다 요시미는 집배원에게 소포 하나를 받는다. 그것을 개봉하니 카야코의 일기와 토시오의 그림이 나온다. 그것을 보고 키타다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표정이 무섭게 변하는데, 카야코 귀신에 그때 씐 것이 아니라 일기와 그림은 저주의 촉매제일 뿐(비디오판 1편에서 칸나가 주운 고바야시의 핸드폰과 같은 역할) 이사 온 직후부터 귀신에 씌어 있던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집이 팔렸다는 얘기를 듣고 쿄코가 그 집을 찾아가는데 창밖으로 키타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는 장면이다. 쿄코는 키타다의 눈빛을 보고 그녀가 귀신에 씌었음을 직감한다. 그래서 그 집에 대해 알아보려고 자료를 부탁한 것이고, 그 집에서 살인 사건이 있었고 고바야시의 아내 마나미가 현재 오빠(타츠야)와 조카(노부유키)가 사는 아파트 집에서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만약 키타다가 창밖으로 쿄코를 쳐다봤을 때 귀신 씐 것이 아니었다면 쿄코가 그렇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을 리 없고 그 집에 대해 알아봤을 리도 없다. 또한 키타다가 창밖으로 쿄코를 쳐다봤던 시점이 소포를 받은 후 귀신에 씌어 남편을 프라이팬으로 쳐 죽인 뒤의 일이라 한다면, 쿄코가 그 집을 찾아갔을 때 남편이 집을 나와 그녀를 지나쳐 가는데 그렇게 되면 프라이팬으로 머리 맞고 사망한 남편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리인데 그것은 내용상 말이 안 되므로 키타다가 창밖으로 쿄코를 쳐다봤던 시점이 소포를 받은 시점보다 먼저인 것이다. 따라서 창밖으로 쳐다봤을 때 이미 귀신에 씌어 있었으므로 소포로 받은 일기와 그림을 보고 귀신에 씌었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다.

시골 부모님 댁에 온 쿄코가 아기 인형을 안고 머리칼을 흔든 까닭은 마나미(아내 고바야시)의 혼령이 그녀의 육신에 빙의했기 때문이다. 마나미는 임신한 상태에서 살해당했으므로 아이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사오리 편에서 들리는 대화는, 부동산 매물로 나왔으나 흉흉한 소문 때문에 팔리지 않은 그 집에 흉가 체험을 하러 온 두 여자의 목소리다.


동양의 일본 영화라서 그런지 가부장제의 모습이 곳곳에서 발견된다(물론 동양이 가부장적이라는 것은 오해고 편견이다.). 고바야시 부부를 보면 남편은 밖에서 일하는 가장이고 아내는 집에서 살림하는 주부다. 아내의 임신한 모습은 출산과 육아의 의무를 진 전통적 여성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는 가정 방문 때문에 퇴근 후에도 집에서 일하는 남편을 보며 선생 일이 쉽지 않다고 말하는데, 이는 남자가 밖에서 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고 여자가 집에서 하는 살림은 쉬운 것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남편 앞에서 편한 자세로 잡지를 보며 요거트를 떠먹는 아내의 모습은 일 때문에 생각에 잠긴 남편의 모습과 대비되어, 여자는 집에서 편하게 놀고먹는다는 인상을 풍긴다. 그럼으로써 남자의 역할은 위대하고 여자의 역할은 하찮다는 부권(父權) 중심의 비뚤어진 시각이 형성된다.

칸나의 가족도 집에서 아빠가 한 번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빠는 밖에서 일하고, 엄마가 잠깐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엄마는 집에서 살림하는 일반적 가부장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키타다 부부도 그러하고, 스즈키 부자(타츠야와 노부유키)가 사는 아파트를 잠깐 비추는 화면에서도 유모차 끌며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여자들이다. 노부유키는 아빠(타츠야)가 엄마와 이혼한 탓에 집에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은데, 그런 그를 돌보는 엄마 역할을 하는 것도 여동생 쿄코다(타츠야의 부탁을 받아 노부유키의 상태를 확인하러 집에 들른다.). 노부유키는 아빠가 다가가도 그에게서 멀찍이 달아나 귀신 들린 쿄코 곁에 머문다. 이는 마치 아이는 아빠가 아니라 엄마가 길러야 한다는 가부장적 양육 철학에 대한 옹호처럼 느껴진다.

중하고 어려운 일은 남자가 맡아야 한다는 성 역할의 고정관념에 따라 형사와 부검의는 모두 남자다. 여자 경찰은 손님(카야코)이 찾아왔다고 알리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이즈카 형사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로 보아 그녀의 직급은 그보다 낮다고 판단된다. 또, 타츠야는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운영하는 사장이지만 함께 일하는 여자는 보조 역할의 일반 직원이다.

칸나는 공부하기 싫어서 가정 교사에게 남자 친구 있느냐고 묻는다. 가정 교사는 츠요시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예쁜지 물으며 사진을 보고 싶어 한다. 두 여자의 이런 모습은, 여자들은 연애에만 관심 있고 남의 외모나 따진다는 여성 비하적 시각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즈호가 학교에서 사라진 츠요시를 찾을 때 츠요시 친구에게 그를 찾는 것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데, 이런 모습도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남자에게 의존하는, 가부장제 관점의 왜곡된 여성상과 흡사하다.

전통적이고 반동적인 가부장제의 관점으로만 해석되는 것은 아니다. 남성 우월주의에 반기를 들고 대항하는 페미니즘적 시각도 존재한다. 남편 키타다가 아침 식사 자리에서 커피가 어떻고 계란이 어떻고 잔소리하자 아내 키타다가 프라이팬으로 그의 머리를 내리쳐 죽인다. 내용상 귀신에 씌어서 살해를 저지른 것이지만, 아침 차려주는 아내에게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잔소리나 해대는 남자들에 대한 비판이자 권선징악의 교훈을 일깨우는, 그럼으로써 페미니즘은 옳고 가부장제는 그르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상징적 살인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선(善)인 아내가 악(惡)인 남편을 처단함으로써 아침 밥 안 차릴 자유를 얻게 된 셈이다. 남편은 가부장제, 아내는 페미니즘, 프라이팬은 가부장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남녀 평등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페미니즘적 실천 행위라고 이해하면 된다.

학교에서 노부유키와 급우들이 교실 청소를 하는데 남학생들이 놀기만 하고 있자 여학생들이 왜 청소 안 하느냐고 따지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남학생은 남편을, 여학생은 아내를, 교실 청소는 집안일을 상징한다. 남학생은 놀고 여학생만 청소하는 부당함에 대해 따지고, 함께 청소할 것을 요구한 행위는 이제 남편들도 가사 노동에 동참해야 한다는, 가사는 아내만의 일이 아니라 부부 공동의 일이라는 페미니즘적 양성평등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다. 남학생은 여학생을 보스(boss)라고 놀리는데, 이는 여자도 가장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남자에게 따지고 맞서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여성스럽지 않다고 한 남학생의 발언은 남성스러움과 여성스러움을 나누고 여자에게 여성스러움을 강요해서 남자에게 복종하도록 만드는 가부장제의 편협하고 권위적인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3. 표현

집을 가리고 있는 나무는 귀신의 저주를 상징한다. 카야코가 나타나는 곳에는 모두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있다. 나무에 가리고 둘러싸인 집의 모습은 정말 저주에 걸린 것처럼 불길한 기운을 풍긴다. 그루지 2편과 3편에서는 풀 없는 앙상한 나뭇가지가 저주를 상징하는 역할을 했다.

전경(前景)에 장애물을 배치해 화면을 일부러 답답하게 만들어 시청자에게 긴장감을 조성하는 장면이 역시 당연히 여럿 등장한다. 공포 영화에 단골로 쓰이는 화면 구성이기 때문이다. 인물과 대상을 온전히 드러내는 방식은 액션이나 코미디에 어울리지, 행위보다 분위기가 중요한 공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인물 앞에 장애물이 걸려 있고 걸리적거려야 찝찝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탁 트인 화면은 인물에게 주체성을 부여하고 시청자에게 해방감을 주기 때문에 긴장되고 불안한 기운을 표현하는 데 역부족하다. 장애물 없이 숏을 받는다는 것은 그 인물이 화면 속 능동적 행위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장애물에 가려, 혹은 장애물과 함께 숏을 받는다면 그 인물은 한 배경의, 한 풍경의, 한 화면의 구성 요소에 지나지 않게 된다. 수동적 객체로 전락한 인물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게 아니라 이야기에 이끌려 가는 느낌을 준다. 전경의 장애물과 후경의 배경이 인물 앞뒤를 막기 때문에 감옥처럼 인물을 가두고 있는 느낌도 준다. 그런 화면에 배치된 인물은 능동적으로 상황을 만나는 자가 아니라 수동적으로 상황에 던져진 자가 된다. 그럼으로써 귀신이나 괴물에게 쫓기고 당하는 공포 영화 속 인물의 수동성과 객체성이 화면에 표현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답답한 화면이 공포 영화에 잘 어울리는 것이다. 또, 누구를 숨어서 엿볼 때 시야가 장애물에 가리는 경우가 많으므로(대놓고 본다면 시야에 장애물이 있을 리 없다.) 그렇게 장애물이 걸리는 화면은 마치 귀신이 훔쳐보고 있는 듯한 효과를 낳는다.


노부유키가 집에서 혼자 텔레비전을 볼 때 화면이 깨지는 현상이 발생하고, 그 직후 귀신의 존재를 감지하고 무서워한 뒤 시청자가 보고 있는 영화의 화면도 깨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니까 깨짐 현상이 영화 속 화면(노부유키가 보는 텔레비전)에서도 발생하고 우리 시청자가 보는 영화 자체 화면에서도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깨짐 현상이 귀신의 장난이므로 깨진 화면을 본 노부유키 곁에 귀신이 함께 있었고 그 화면을 본 직후 귀신이 나타났듯이, 영화 자체의 깨진 화면을 보고 있는 시청자 곁에도 지금 귀신이 있고 그런 깨진 화면을 보았으니 귀신이 금방 나타날 것이라는, 그러니까 깨진 화면을 본 노부유키처럼 시청자도 귀신에게 당할 것이라는 의도로 연출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꽤 기발하고 무서운 장면인데 정작 영화 보고 있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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