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온의 저주보다 무서운 소포모어 징크스
어떤 장르든 시리즈의 말로는 처참하다. 원작이 아무리 좋아도 2편, 3편으로 나가는 순간 원작의 후광은 사라지고 재탕의 악순환만 반복된다. 연속물 중 그나마 괜찮은 것이 에이리언인데, 그것도 여러 감독의 개성에 따라 변주되었기에 망정이지 한 감독이 재탕만 되풀이했다면 지금보다 못한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뭐든 반복하면 지루해지듯이 영화도 재탕하면 질이 떨어진다. 속편과 시리즈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꼭 필요하다. 1편에 해당하는 전작에 궁금증을 남겨 놓을 것.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미지의, 미궁의 건더기가 있어야 속편이 성공한다. 그래야 관객들이 또 봐준다.
속편이나 시리즈가 1편에 비하여 부진할 때, 이를 가리켜 소포모어 징크스라고 한다. 대개 영화판에서 속편이 잘된 경우는 드물다. 시리즈는 갈수록 망한다. 원작에서 공포의 화신이었던 캐릭터가 시리즈를 거치며 코미디 캐릭터로 저하되는 사례도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제이슨과 프레디다. 이제 이들은 무섭지도 않다. 심지어 프레디는 귀엽기까지 하다. 지금 와서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시리즈의 악영향은 그만큼 비참하다.
그래서 공포영화는 재탕을 삼가야 한다. 재탕되는 순간 귀신, 괴물, 살인마의 노출이 잦아지고, 그 빈도는 관객의 무지(無知)와 미지(未知)를 익숙함으로 바꿔버려 공포에 면역되게 만든다. 몰라야 무서운 법인데, 낯설어야 무서운 법인데 다 알고 친숙하니까 전혀 무섭게 안 느껴지고 오히려 억지스럽고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주온과 그루지도 이를 비껴갈 수 없다. 주온이 시리즈로 최근까지 제작되었고, 그루지는 3편까지 나왔다. 과연 무서울까? 비디오판 원작의 영광을 되살릴 수 있을까? 이미 관객은 카야코의 사연을 알고 있고, 시리즈를 통한 잦은 출몰에 의해 그녀에게 익숙해진 상태다. 피칠갑의 꺾기 출현은 우스꽝스러운 꺾기춤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관객이 공포를 느낀다는 것은 무리고, 주온이 재탕되는 것은 무리수다. 전술했듯이 공포 영화가 시리즈에 의해 변질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성공하려면 전작에 미지수를 남겨 뒀어야 하는데, 근래 영화들은 귀신의 깜짝 출몰에만 혈안이 돼 있고 인물만 바꿔 저주의 재탕 실험을 반복하고 있다.
차라리 공포 딱지 떼고 코미디로 사업 전환하는 게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돈 내고 극장에서 봐 줄 의향이 조금은 있다.
1. 장르의 변환
코미디로 전환하라는 말은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코미디로 성공할 가능성을 몇 가지 감지했다. 앨리슨이 저주에 시달려서 선생을 찾아가 집에 보내 달라고 울먹일 때 양쪽에 친구들 귀신이 나타나고 선생도 귀신이 되어 좀비 소리를 내는데, 이 장면을 보고 나는 폭소를 터뜨렸음은 물론이고 주온이 좀비 영화로 호환될 수 있음을 확신했다. 여기에 치고받고 싸우는 활극만 추가된다면 공포 영화로 개봉될 때보다 더 많은 관객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전설의 카야코가 인간한테 맞는다고 생각해보라. 그것은 코미디를 넘어서 혁명에 가깝다.
그리고 카야코 엄마는 영어를 왜 그렇게 잘하나? 무당으로 시골 촌구석에서 살아온 노인이 영어를 원어민 뺨치게 한다. 진짜, 영어 듣자마자 웃음 터졌다. 카야코 엄마의 카리스마가 외국 관객을 위한 영어 대사 탓에 진지함을 잃고 실추되었다. 공포 영화는 진지함과 사실감이 생명인데, 즉 그럴싸함을 추구해야 하는데 카야코 엄마가 영어를 잘한다는 생뚱맞음 탓에 영화 분위기가 확 깨졌다. 또한 카야코 엄마가 등장한다는 설정도 억지에 가깝다. 비중 있는 인물로 출연했으면 무언가 보여줘야 하는데 뚜렷한 역할도 없고 그저 친자(카야코)한테 살해당하는 패륜의 고통만 보여주고 퇴장한다. 그 때문에 단서가 되는 카야코의 어린 시절 일기장도 소품으로 등장하고, 어렸을 적 사연이 공개됨에 따라 관객이 그녀에게 가지고 있는 공포의 근원인 무지와 미지도 친숙함으로 변질된다. 그렇다고 죽이는 장면이 무서운가? 그루지 1편에서는 깜짝 놀래기라도 했는데 2편에서는 낄 데 안 낄 데 구분 못하고 거의 매 신마다 카야코가 등장한다. 잦은 출현은 관객에게 친숙함으로 다가오고 결국 카야코는 비극적 인물이 아니라 희극적 인물로 변질된다. 심지어 주온 시리즈의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카야코의 마지막 일격(끄어어 하면서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은 원작에 대한 충실함을 거역하고 새롭게 바뀌었지만 공포감은 물론 충격과 놀람도 주지 못한다. 피칠갑 한 모습보다 허옇게 분칠한 모습이 약해 보임은 당연하다. 이슨의 인화실에서 오브리를 공격할 때 카야코의 얼굴은 예뻐 보이기까지 한다.
전작에서는 그래도 죽이는 데 원칙이 있었다. 카야코는 집 안에 들어온 사람만 죽였다. 일단 집에 발을 들여놓으면 일하는 직장까지 찾아가서 죽였다. 그래서 이번 외국 원정 살인은 나름대로 수긍된다. 앨리슨이 일본에서 죽지 않은 채 외국으로 도망했으니 거리가 멀더라도 쫓아가서 죽이는 것이 원칙에 맞다. 그래서 나는 원정 살인에 대해 억지스러움은 느끼지 못했다. 혹자는 외국까지 쫓아와 죽인다는 설정이 우스꽝스러웠다고 하는데, 따지고 보면 그게 원칙에 맞는 설정이니 우스꽝스럽다고 할 것까지는 없다. 문제는, 원칙을 어기면서 무모한 사람까지 죽였다는 데 있다. 본래 카야코는 집에 들어온 사람만 죽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집에 들어온 사람뿐 아니라 희생자와 관련된 사람까지 막무가내로 죽인다. 제이크와 그의 아빠, 누나, 새엄마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 그들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가. 그들은 카야코의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미국 시카고에서 잘살고 있었는데 말이다. 귀국한 앨리슨 때문에 연립주택 전체까지 저주가 퍼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완전 억지다. 감독은 재미와 서사 전개를 위해 원칙을 어겼음이 확실하다. 설마 뭐 잘못된 일이라도 생기겠어, 하는 심정으로. 그런데 이러한 무원칙의 살해가 동양 공포 특유의 기묘함과 진지함을 몰아내고, 영화 장르를 좀비 혹은 살인마가 나와서 난장판 피우는 서양 싸구려 스릴러로 변질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집 밖에 있는 오브리를 억지로 순간 이동 시키는 장면을 보며 나는 이 영화가 스스로 공포임을 망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주온과 그루지는 공포가 아니다. 코미디나 스릴러로 분류해야 함이 옳다.
2. 주제의식
감독이 나름 생각이 있었던 모양인지 상업영화에 예술인 척 메시지를 끼워 넣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기법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다만, 잘 숨겨 놨느냐 아니면 삼류처럼 자랑했느냐 하는 차이에 따라 평가가 갈릴 뿐이다.
영화에 유독 가족관계를 암시하는 단서가 많다. 주인공 오브리는 엄마와도 사이가 안 좋고 언니와도 사이가 안 좋다. 그녀는 이슨에게 언니와 불화가 있었음을 실토한다. 이슨도 마찬가지다. 그는 홍콩에서 4년간 형 집 근처에 살았는데 형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다. 제이크는 새엄마 트리시를 가족으로 맞이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친엄마를 그리워한다. 그가 무서워하며 벽장에 숨을 때 카메라가 누나의 시선으로 벽장 속에 걸린 친엄마 사진을 비추는데, 이것은 제이크가 친엄마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뜻한다. 감독은 이렇게 가족과 단절된 현대 인간상을 제시하고 고통과 슬픔을 나눌 사람은 가족밖에 없음을, 오브리에게 저주 걸린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귀띔하는 언니 카렌을 통해, 그리고 혼자 무서워하는 제이크를 보듬어주는 누나 라시를 통해 역설한다. 또, 가족 간의 반목과 불화란 제이크 아빠와 새엄마가 귀신에 씌어 불륜 의심하고 살해했듯이 비정상적 현상이라는 메시지도 건넨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가족밖에 없으니까 평소에 잘 챙기라는 말.
3. 기타
앨리슨이 바네사와 미유키의 꾐에 빠져 카야코의 집에 들어설 때 그녀는 혼자 겉옷을 입고 있다. 쉽게 말해 앨리슨만 동복 차림이고 바네사와 미유키는 춘추복 차림이다. 이런 복장 차이는 서로의 처지와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춘추복 차림인 바네사와 미유키는 서로 한패다. 앨리슨을 놀려주려는 한패. 반면 앨리슨은 놀림과 은근 따돌림을 당하는 혼자다. 그래서 혼자 동복 차림인 것이다.
그루지에서 물은 부정적인 이미지다. 토시오가 아빠에 의해 욕조에서 질식사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물은 항상 죽음과 가끼이 있다. 1편에서 피터가 자살하기 전에 카메라는 도시의 검은 강물을 보여준다. 그 물은 토시오가 빠진 욕조의 물을 연상케 한다. 이 영화도 오프닝 타이틀에서 빨간 핏물을 보여주는데, 그 이미지가 디졸브 처리되어 연못에 담긴 물로 이어지고 그 표면에 앨리슨, 바네사, 미유키의 하교 모습이 비치게 된다. 물은 부정적 이미지므로 그들이 물에 비친다는 것은 곧 저주에 걸려 죽을 것이라는 암시와 같다. 인화실에서 귀신이 이슨을 죽일 때도 물에서 튀어나온다.
오브리가 캘리포니아에 있는 엄마 집에 당도할 때 카메라는 정원에서 놀고 있는 두 아이를 비춘다. 그들은 누구인가. 엄밀히 말하면 비중 없는 동네 꼬마들인데, 상징적으로 따지면 카렌과 오브리 자매를 뜻한다.
오브리가 엄마 집에 들어왔을 때 카메라는 탁자에 놓인 액자들을 비춘다. 엄마는 평소 오브리보다 카렌을 좋아했기에("엄마가 내게 냉랭한 것을 언니 탓으로만 돌렸죠.") 카렌의 사진이 더 많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독사진도 있고 거의 모든 사진에 있는 땋은 머리 소녀가 카렌이고, 앞서 말한 정원에서 노는 꼬마 중 분혹색 옷의 꼬마가 땋은 머리를 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카렌과 오브리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화면에 아웃포커스 처리된, 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은 그들이 카렌과 오브리를 상징하는 데 가능성을 더해준다. 전술했듯이 물은 부정적인 뜻이기 때문이다. 두 꼬마 앞을 물이 가리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저주에 걸려 죽을 것이라는 암시다. 그런데 누가 죽는가? 저 두 꼬마가 죽는가? 아니다. 카렌과 오브리가 죽는다. 따라서 그 두 꼬마는 카렌과 오브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처음에 카메라가 제이크 가족이 사는 연립주택을 비춘다. 나뭇가지가 건물을 가리고 있는데, 그 모습은 카야코 집에 뻗친 나뭇가지 형태와 흡사하다. 기분 나쁘게 생긴 그 나뭇가지는 집이 저주에 걸렸음을, 귀신에 씌었음을 뜻한다. 나뭇가지에 가린 연립주택 장면(上) 후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제이크의 새엄마가 아빠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후라이팬으로 내려친다. 이는 귀신 들린 행동으로, 연립주택을 가린 나뭇가지가 저주를 상징한다는 것을 방증한다.
오브리의 엄마는 그녀를 카렌이 있는 일본으로 보내면서 이런 말을 한다. "그래서 카렌이 너와 다르다는 거야. 그 애는 현실을 회피하지 않아." 그녀의 말대로 오브리는 처음에 카렌의 죽음과 그 집의 비밀에 대해 소극적 반응을 보인다. 그러다 나중에 자매애(姊妹愛)를 느끼고 카렌의 죽음을 풀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데, 이는 감독이 주인공인 그녀를 단면적 인물이 아닌 복합적 인물로 만들기 위해 고안한 장치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감정과 행동 변화를 일으키면 이야기는 한층 극적으로 변한다.
교실에서 선생이 한자를 가르치는 장면이 나온다. '눈 목(目)' 자와 '문 문(門)' 자를 예로 들어 한자가 상형문자임을 설명하는데 여기서 눈은 카야코 귀신의 눈을, 문은 카야코 집의 대문을 연상시킨다. 문이 두 짝이라고 했는데 그 집의 대문도 두 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