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사 그리고 한강 작가
가을이 오면 구인사에 한번 더 가자 라는 말을 했었기에 주말에 구인사를 다녀왔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은 밤, 아내와 '축하' 맥주 한잔을 하다가 급히 정한 일정이었다.
새벽배송으로 온 샌드위치를 챙기고, 커피를 내리는 등 부산을 떠는 통에 일찍 깬 딸아이에게 커피 한잔을 내려준 후 집을 나섰다.
최근 강화도에 위치한 보문사엘 다시 다녀왔고, 돌아오는 길에 하필 식사를 전등사 앞 보리밥집에서 하는 바람에 전등사에도 들러 절 곳곳에서 기도를 하고 왔다. 하지만, 물리적 거리만큼 마음으로 느끼는 거리 또한 강화도보다는 단양이 훨씬 먼 터라 구인사엘 가려면 마음을 굳게 먹고 가야 했다. 7시에 출발해 구인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9시 20분이 조금 넘었다. 지난번에 못 탄 셔틀버스를 타고 구인사 시외버스터미널까지 올라가니 오늘은 좀 더 수월하게 구인사를 둘러볼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주문을 지나 익숙한 걸음으로 차분히 대조사전까지 올랐다. 대조사전 마당에서 뒤돌아 바라본 구인사 풍경은 여전했다.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아, 11월에 다시 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조사전 앞마당은 지난 5월에 봤던, 초파일을 준비하는 다양한 물품과 기구들이 치워져 대운동장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조사전에 들러 절 하고, 지난번에 못 갔던 적멸궁에 오르기로 했다. 적멸궁은 구인사를 창건했던 스님인 상월원각대조사(상월조사)님의 묘역이다. 조금만 오르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한참을 올라도 계속 길이 이어졌다. 보문사 석불 오르는 계단길이 많다 했는데, 적멸궁을 오르다 보니 또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거같이 생각됐다.
적멸궁에 올라 묘역에 절하고 기도를 드리는데, 뒤에서 아이를 데리고 온 아주머니가 아래에 두고 온 아이와 영상통화를 한다며 시끄럽게 군다. 저러다 말겠지 하며 신경을 안 쓰려고 하는데 계속해서 큰 목소리로 웃고 떠드는 걸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통화하시는 게 어떨까요?'라고 하니 그제야 전화를 끊는 시늉을 한다. 그러고는 옆에 앉은 아이와 대화를 시작한다.
대체 그 높은 곳엘 올라와서 뭐 하자는 건지 라는 말이 절로 나왔으나, 올라오는 말을 꾹 누르고 참기로 했다. 어딜 가나 타인에 대한 배려와 기본적인 예의가 없는 사람들은 존재하니, 그걸 하나씩 참지 못하고 건드리기 시작하면 내가 못 살 것이다. 그래도 그런 기본적인 것들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려 산다는 건 힘겨운 일이다.
적멸궁에서 내려와 조사전 가는 길에 바라보니 어느새 안개가 걷혀 멀리까지 보였다. 황금색 기와가 푸른 숲과 대비를 이룬 것이 대조사전 마당에서 바라볼 때와는 많이 달라, 보기에 좋았다.
조사 전에서 다시 절하고 내려오는 길에, 된장국 냄새가 너무 좋아 코를 킁킁거리니 뒤에 따라 내려오시던 보살님께서 지나가듯 한마디를 하신다.
'공양간은 저쪽이니 들러서 공양하고 가세요'
공양간 출구를 지나쳐 내려가다 말고, 아내와 얘기 후 돌아서서 공양간으로 들어갔다. 김치, 고추찜, 호박찜, 된장국 등 소박한 찬이지만 적멸궁까지 다녀오느라 기운을 썼더니 고추장 약간을 섞어 비벼 맛있게 비웠다.
구인사에서 내려와 단양 읍내에서 조용한 카페를 찾았지만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시장 근처 빵집에서 커피 한잔을 마셨다. 한 시간 반 가량을 더 보낸 후 단양 시장 골목에서 마늘순대가 유명하다는 말에 순대국밥을 말아먹고 강정과 통닭 한 마리를 사곤 길을 돌렸다.
좁은 시장과 힘겨운 주차, 덜거덕 거리는 하상 주차장 바닥에 지쳐 11월에 구인사를 다시 오더라도 단양에는 들르지 말자고 말하며 집으로 올라왔다. 지난 5월 연휴때와는 달리 2시간 30분 만에 집에 돌아와, 다 식은 통닭이지만 튀긴 야채와 마늘이 맛있다며 저녁으로 먹었다.
구인사엔 11월에 한번 더 가야지 싶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탔다는 소식을 듣고 책장을 뒤졌더니 작가가 오래전에 냈던 시집 한 권만이 달랑 남아있다. 밤늦게 들어온 딸이 한강 작가 책이 있냐고 묻길래, '아빠가 몇 년 전에 중고책으로 다 팔았네'라고 했더니 혀를 끌끌 찬다. 요즘의 다른 보통 아이들처럼(?) 책을 별로 읽지 않는 딸아이가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거 같아 그건 그거대로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이 기쁜 마음이다.
오래전 읽었던 기형도 시인의 시 중에 소리의 뼈라는 작품을 보면, '말과 소리를 잘 듣는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키운 다음이야'라고 말하는 거 같은데,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는데 책을 읽는 것만큼 좋은 건 없는 거 같다. 중고서적이 비싼 값에 팔리고, 서명본이 더 비싼 값에 올라오는 등 그건 그거대로 좋은 일이라 생각하지만, 결국 이번 기회에 책을 읽는 사람이 많이 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희망일 것이다. 나는 나대로 그러면 보통의 배려와 예의 정도는 차리고 사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라는 희망과 함께.
소리의 뼈 - 기형도
김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었다
모두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 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 삼아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는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