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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처 Jun 08. 2024

소설은 그런 게 아니라서

단편소설

  소설을 배우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털어놓았을 때 우려와 달리 해주 언니는 흥미 있어하며 대단하다고 나를 치켜세웠다. "아니에요, 정말 배우고 있는 중이에요."라고 말한 것은 일단 그녀의 기대치를 낮추고 싶은 마음과 함께 정작 털어놓긴 했지만 소설에는 관심 없는 사람들이 소설을 쓴다는 행위에 대해, 아니 정확히는 소설을 쓴다는 사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좀체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원 첫 학기를 마치고 갖는 회식자리였는데 얘깃거리가 슬슬 고갈될 때쯤 저는 짬 내서 이런 걸 해요, 라는 자기소개, 혹은 가공된 자기 포장적인 소재가 돌던 참이었다. 내 차례가 왔고, 나는 다른 건 지어내서라도 말할 게 없어 사실대로 소설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이미 여러 편을 썼다는 얘긴 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독자를 확보한 그럴듯한 작품은 없다는 말은 더더욱.

  내 다음 사람의 소일거리로 차례가 넘어가길 바랐지만 이 대화는 좀 더 이어졌다. 동기들 중에서도 나이가 가장 많은 해주 언니가 또 물었다.

  "무슨 얘기를 써? 실제 겪은 일 같은 거 쓰는 거야?"

  "주로 혼자 하는 상상 같은 거요."

  "그렇구나. 나 진짜 소설로 쓰면 좋겠는 이야기 많은데."

  그러면서 그녀는 자기 이야기를 풀어냈다. 현재 전셋집 집주인이 자기 위층에 사는데 너무 이상해서 기분 나쁘게 신경이 쓰인다는 것이었다. 한 번은 건물 주차 라인에 좀 비뚤어지게 주차를 했다고 다시 대 달라고 했다면서, 그것도 밤 열한 시에. 부딪히기엔 껄끄러워 적당히 다시 주차하면서 올라오려는데 집주인 여자가 문 앞에서 한마디 한다. 딸 같아서 하는 얘긴데 술 적당히 마시고 술병은 안 보이게 잘 좀 버려줘요. 애들 보기에 안 좋으니까. 애들이요? 옆집에 애들 살잖아. 이웃끼리 서로 좋은 걸 보여야지.

  집주인 말은 해주 언니의 옆집 사는 아이들 보기에 안 좋을 수 있으니 좀 조심해 달라는 것이었다. 참 대단한 오지랖이다, 남이사 술을 마시든 말든. 한마디 대꾸할까 싶었으나 며칠 전 집들이 명목으로 친구들을 불러 밤늦게까지 놀던 게 떠올라 그만 네, 하고 올라왔단 얘기였다.

  "그런데 있잖아."

  해주 언니는 잠깐 말을 멈추더니 두 눈을 크게 뜨고서 다시 말했다.

  "옆집에는 애들이 없어. 젊은 남자 혼자 사는 모양이던데. 애들은 무슨, 몇 개월째 애들 소리조차 없어."

  나는 그런 그녀의 말에 관심이 가긴 했지만 사실 이 대화가 어서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근데 더 충격적인 건 말이야. 이 아줌마 집에서 옆집 남자가 내려오는 걸 본 적이 있어. 위층에서 말이야. 옆집 사람이 분명했어. 그것도 몇 번씩이나. 이게 무슨 소리겠어?"

  좌중에 아, 혹은 어머어머, 하는 짧은 경탄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예 관심이 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런 이야기는 적잖이 듣는 사람의 관심과 호응을 고려해서 과장되거나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는 건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스스로 내린 결론에 끼워 맞춰 상황을 판단하고 떠벌리는 이런 가십거리를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완전 막장 소설이지 않니?"

  "소설은 그런 게 아니고요."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대꾸가 나왔다. 그 뒤에 또 어떤 말을 할지 생각나는 것도 없어서 금방 후회가 밀려왔다.

  "아뇨, 제가 쓰려는 게 그런 게 아니라서요."

  "왜? 연습 삼아 이런 거 저런 거 써보는 거지. 이거 이야기로 써서 책 나오면 내가 사 줄게."

  그녀가 빙글거리며 꼭 놀리는 것처럼 진짜 재밌을 것 같은데, 같은 소리만 몇 번 더 하다가 대화 주제는 넘어갔다. 아예 소설 얘기는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내세우려던 것도 아니었던 자존심이 어느새 끄집어내져 스크래치가 난 기분이었다.


  "와! 결국 쓴 거야?"

  나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최대한 무심한 표정을 지어가며 해주 언니에게 내가 쓴 짧은 소설을 건넸다.

  "네. 그냥 심심해서 써봤어요."

  그녀는 그 자리에서 곧장 내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오. 신기하네. 나 그러고 나서 진짜 이런 일 있었는데. 집주인이 또 완전 미친 소리 했잖아? 소름이네."

  그녀는 현실에서 벌어졌던 일이 내가 쓴 소설에서 그대로 불러온 것인 양 신기해했다. 처음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런 캐릭터의 집주인이라면 했을 법한 말과 행동을 글로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바라는 건 일종의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임을 눈치챘던 나는 적당히 그럴싸해 보이게 결말까지 마쳐 이 정도 이야기는 충분히 쓸 능력이 내게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결국은 남자가 숨긴 비밀이 있었단 거네?"

  끝까지 읽은 그녀는 뭔가 미심쩍은 게 있어 결말이 별로 만족스럽지 않은 듯해 보였다.

  "아니, 이것보단 집주인이 남편한테 들킨다든지 뭐, 개망신을 당한다든지 그렇게 하면 좋을 거 같은데."

  그녀는 아침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원하는 게 분명했다. 독자의 취향이 작가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경우였다.

  "소설은 화풀이나 저주가 아니라서요."

  나는 절반쯤은 농담을 담은 어조로 얘기했다. 바라는 게 있다고 그대로 써버리는 게 무슨 소설이냐, 주변 사람에 대해 복수하려고 쓰는 게 소설은 아니다, 하는 설명을 굳이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알겠어, 알겠다고."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요즘 들어 유독 표정이 더 좋지 않아 보였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소설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녀에게 최근 들어 심각한 고민이 있다는 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스치듯이 들었다. 결혼하기로 한 상대가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자길 피하는 것 같다는 얘기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의 술자리에서 해주 언니는 예의 농담과 웃음을 섞어 유쾌한 어조로 시종일관 대화의 흐름을 주도하면서 자기 얘길 했다.

  "내 운을 다 썼는지. 이런 남자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이 운이 이어져서 제발 결혼까지 무사 골인만 하면 좋겠어."

  그 자리에 있던 누군가가 내게 소설 쓰는 건 좀 어떠냐며 궁금해했다.

  "아, 내가 읽어봤는데."

  해주 언니는 말을 가로채면서 자못 진지한 말을 할 것처럼 뜸을 들였다. 그러다가 이내 피식 웃으면서 "여기까지."라고 말하고 "건배!"를 외치는 것이었다.

  "뭐, 어차피 연습이었잖아. 책으로 낼 것도 아니고."

  마치 별 일 아닌 일이니 시시한 농담처럼 잊어버리자고 격려하는 투였다. 나는 뭐라고 할 수도 없어서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표정으로 그저 맥주잔의 꺼져가는 거품만 눈으로 흘길 수밖에 없었다.


  술이 다 깨지도 않았지만 모니터를 켜고 빈 문서를 연 내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각성된 채 뚜렷하게만 느껴졌다.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연습 삼아 써 보는 것은 스스로에게 아무런 증명도 할 수 없었다. 없었던 일처럼 정말 잊어버릴까 해도 내 소설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 같다며 신기해하는 그녀의 얼굴 표정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빙글거리며 웃던 그 웃음도. 스크래치 입은 자존심을 회복해야 했다. 나는 그동안 썼던 글을 모조리 지웠다. 그리고 새로운 작품의 첫 문장부터 다시 천천히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때까지 남아있던 일말의 행운을 기껏해야 최악은 면한 남자를 선택하는 일에 다 쓰고야 말았다. 이제부터는 틀림없이 불운만이 그녀를 따라다닐 운명이었다.  ■


사진: UnsplashAlaksiej Čarankievi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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