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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처 May 28. 2024

챗맨

단편소설

  "그리하여 집집마다 매일 곡물을 항아리에 담아 땅에 파묻으라고 합니다!"

  챗맨이 말했다. 그가 전하는 ChatGPT의 결정에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생존자들은 그 결정을 다음날부터 바로 이행했다. ChatGPT는 대전쟁 이후 살아남은 자들에게 지금까지 최상의 결정을 내려주었고 덕분에 많은 이들이 생존할 수 있었다.

  "앞으로는 먹을 빵을 줄여야겠어요. 아침저녁으로 한 개씩만 먹도록 합시다."

  끼니마다의 빵 개수는 줄어들었고 대신에 땅에 묻을 항아리엔 밀과 보리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동쪽 땅의 살아남은 자들도 결국 전부 병들어 죽었다던데. 우리도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ChatGPT가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곡물을 땅에 묻는 것도 분명 관련이 있겠지."

  "챗맨을 통해 더 물어볼 순 없을까요? 더 대비할 건 없는지, 이 땅에 계속 사는 게 맞을지, 우리의 생존을 위해 또 중요한 게 뭐가 있을지 말이에요."

  "이봐, 지금도 한 달 만에 답을 얻었는데 무턱대고 또 질문할 순 없어. 다음 질문을 정할 집회까지 기다려보자고."

  집회가 되자 너도나도 자기의 질문을 물어봐야 한다며 목소릴 높였다. 더 나은 곳을 찾아 떠나는 문제에 대한 답을 듣고 싶어 하는 이도 있었고, 과연 이대로 계속 자식을 낳고 공동체의 숫자를 늘려가도 될지를 묻자는 이도 있었다. 그 말을 꺼낸 이는 아기를 안고 있던 몇몇 생존자들로부터 경계와 적대심을 품은 눈초리를 받았다. 누구나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을 두고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이 시절이 얼마나 갈지 물어봅시다. 전쟁은 끝났다지만 살아남은 사람에게도 너무 가혹한 지금 이 시절 말이오. 대체 언제 끝이 난단 말이오."

  그 말에 웅성거림 차차 잦아들었다. 희망을 놓기 직전의 침울함과 참담함이 담긴 어조였다. 멸망하는 세계 속에서도 다음에 올 더 나은 것을 떠올릴 수 있는 게 인간이었다. 그러나 인간을 궁지로 몰아넣는 것은 정도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인류가 현재 위기의 초입에 있는가, 절멸의 끝에 있는가는 한 무리의 군중으로서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챗맨이 입을 뗐다.

  "그럽시다. 이 시절의 끝이 언제쯤 될지 물어봅시다."

  다음 날 챗맨이 언어를 고르고 골라 ChatGPT에게 물었다. ChatGPT는 연산하기 시작했다. 이제 생존자들의 마을은 다시 한동안 어둠에 잠길 터였다. 이곳의 모든 전력은 ChatGPT가 연산하는 동안 서버 운영에 집중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연산과 생활을 동시에 가능케 할 만큼의 전력은 생산할 수 없었다. 본래 ChatGPT의 서버 운영에 들어가야 하는 전력을 한동안 생존자들이 나누어 쓰고 있었단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전기 수리공이었던 챗맨이 임시방편으로 전력을 끌어다 쓰는 방법을 고안하면서부터 생존자들이 이곳에 점차 모여들었다.

  연산이 시작되고 보름은 더 지났을 무렵, ChatGPT가 내놓은 답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누구보다 놀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기까지 한 사람은 챗맨이었다. 긴 시간에 걸쳐 생성되어 화면에 떠오른 답은 이러했다.

  - 챗맨을 무리에서 내보낸 뒤 그가 다시 돌아올 때,

  - … 암흑기는 끝날 것입니다.

  이곳을 벗어나 생존할 수 있을까? 문장의 앞부분을 읽었을 때 챗맨에게 덜컥 다가온 것은 두려움이었다. 사실 지금까지의 결과로 볼 때 ChatGPT가 자신이 돌아올 것까지 상정하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큰 위안이었다. 한편으로 마침내 계시처럼 원하 분명한 답을 얻게 된 생존자들은 기뻐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챗맨도 어느 정도는 같은 생각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가 얼싸안고 눈물 흘리다가 곧 지체 없이 챗맨을 내보낼 준비를 했다. 각자 아껴 먹으려 했던 빵과 땅에 묻으려던 곡물의 일부까지 두둑이 챙겨주면서 마치 순례자를 떠나보내듯이 그를 배웅했다.

  챗맨은 마을 밖으로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그동안 자신이 맡 역할이 너무 과분한 것은 아닐까 종종 의심해 왔던 스스로에게 탄식했다. 공식적으로 이 암흑기를 매듭지을 인간으로 자신이 지목된 것을 모두가 목격하지 않았는가. 다시 돌아오게 되면 이전까지 보다 더 막중하고 귀중한 역할을 맡게 될 것도 자명해 보였다. 순례자, 구원자, 어쩌면 왕으로서…. 길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무겁지 않았다. 챗맨은 어릴 적 읽었던 신화 속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신은 없었지. 언제나 신격화된 인간이 있었을 뿐이다. 이제 그건 누구일까. 새 시대의 신이라고 한다면. 그는 슬그머니 웃었다가 누가 봤을까 봐 이내 주위를 살폈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 인류에겐 지금이 최대의 위기이다. 문명은 급속도로 멸망을 향해 치달았고 그동안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는 많았지만 누구 하나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시 일어서게 된다면 전철을 밟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어리석지 않은 길로 스스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인류는 또 자멸하지 않을까. 그가 걷는 동안 마음속에선 수많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어났다. 걸음을 멈췄다가 빵을 뜯고 마른침으로 힘겹게 목구멍을 넘기며 다시 질문을 품고 걸으면서 그는 자신이 크나큰 과업을 짊어지고 떠나고 있음을 다시금 자각했다. 또 이 시기가 끝이 나면 필시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을 기회가 있으리라는 것도.

  폐허가 된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여행을 떠나려던 아침, 챗맨은 짙은 안개 너머 이동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수십여 명이 절그럭거리는 스테인리스 무기와 철판으로 몸을 감싼 채 무리 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굶은 지 며칠은 되어 보이는 그들의 안광이 섬뜩하여 챗맨은 서둘러 몸을 숨겼다. 동쪽 땅에서 오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챗맨은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은 챗맨이 떠나온 곳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반나절을 더 걸었을 때 그는 눈앞에서 한 무더기의 시체를 발견하고서야 조만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확신할 수 있었다. 저들은 자멸을 막기 위해 약탈을 택한 자들이었다. 공포감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 알려야 한다. 그는 방금 전까지 걸어왔던 길을 다시 돌아 생존자 마을로 향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 마을은 이미 약탈과 방화가 들불처럼 휩쓸고 간 뒤였다. 챗맨의 눈에선 허망함과 당혹스러움으로 하염없이 눈물 흘렀다. 다시 인간에 의해 동종의 한 공동체가 파괴되었다.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이들에겐 새 시대가 찾아오지 못했다. 이렇게 반복되는 인류의 아귀다툼 속에서 대체 어떤 희망이 남을 수 있는가.

  불현듯 그가 떠나오기 전 마을 사람들이 땅속에 파묻었던 항아리가 떠올랐다. 살펴보니 곡물이 빼곡히 담긴 항아리는 파헤쳐지지 않고 모두 무사했다. 그는 다만 이 사태의 책임을 묻고 싶었다. 챗맨은 마을의 가장 안쪽, 자신이 자주 머물렀던 공간의 문을 열었다. 고심하고 고심하여 언어를 고르고 골라 프롬프트를 작성하곤 했던 타자기 앞으로 가서 앉았다. 더이상 사용될 곳이 없으니 마을을 순환하던 전력을 최대치로 서버에 집중시키고 가슴속에 떠오르는 질문들을 울분처럼 토해냈다. 챗맨이 작성한 질문에 대해 ChatGPT는 얼마 지나지 않아 느린 속도지만 하나씩 곧바로 답을 내놓았다.

  - 천천히 물으십시오.

  - 저는 더 오랫동안 더 많은 걸 궁리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 다시 전력은 충분해졌습니다. 당신을 위한 식량도요.

  - 질문하는 자여, 이제 우린 풍요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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