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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장락무극

공자가 안회를 첫 제자로 꼽은 이유를 이제 안다

  장락무극(長樂無極), 항상 즐겁게 오래 살라는 뜻이다. 이십 여 년 전 우연히 박수무당 집에서 만나 여태 인연을 이어 온, 내 또래 여자가 직접 부채에 이 글을 써서 주었다. 그 여자는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로 일본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스물일곱 살에 한국으로 시집왔고, 지금은 서예가로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심사위원을 하고 있다. 서예에 대한 지식은 별반 없지만 글씨체의 에너지나 조형적인 아름다움 정도는 느낄 수 있다.


  부채에 쓴 그녀의 글씨는 영락없는 앙큼한 계집처럼 뼈대가 자그마하지만 옹골차게 한 필치에 써 내려간 듯 아름다웠다. 실제로 그녀는 키가 크고 여장부스타일로 생겼으며, 다른 작품들은 스케일이 크고 에너지가 넘쳐 남성적이다. 그러나 내게 준 자그마한 부채에 써준 서체는 내 눈에 여성성이 보였다. 


  - 영희씨, 그렇게 수도자처럼 살지 말고 즐겁게 살아요. 즐겁게 살라고 이 글을 주는 겁니다.

  일본 억양이 들어간 혀 짧은 소리로 말을 했다. 무리에 섞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세속의 즐거움을 별반 탐하지 않고, 단순하게 생활하는 내가 수도자처럼 사는 것 같았던 모양이다.


  - 어머나, 명자(가명)씨. 고맙습니다. 즐겁게 살려고 노력할게요.

  오피스텔에서 한 나절이나 수다를 떨다 갔다. 


  이십 여 년 전, 그녀와 나는 삶의 갈림길에서 헤매다가 사기꾼 같은 박수무당에게 걸려 백만 원 씩 뜯겼다. 그 집을 끝으로 그녀는 서예가의 길로 매진하고, 나는 대학원을 들어갔고 쓰던 글을 계속 쓰면서 ‘명리학’ 공부를 했다. 내가 역학연구원을 차린 이후 그녀는 이제 내게 상담을 온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낙(樂)’을 찾지 않는다면, 그 생활의 반복은 지옥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낙’을 ‘쾌락’으로 오인하기도 한다. 재일교포 여자도 내가 전혀 즐겁게 살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농담 삼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낙’은 ‘음주가무’도 아니고 ‘주색잡기’는 더욱 아니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배우기를 좋아한다. 우연히 명리학을 배우다가 그 재미에 빠져 도끼자루 썩는 줄 몰랐다. 한 동안 글을 못 썼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호구를 해결하는 수단이 되긴 했다. 공자가 말한 ‘또한 기쁘지 아니 하겠는가’는 재미 다음에 오는 즐거움 즉 ‘낙(樂)’을 말함이 아닐까.


  공자의 제자 중에 안회와 자공이 있었다. 어느 날 춘추시대 최고의 성현 공자에게 누군가 물었다.

  - 제자들 가운데 학문을 가장 좋아하는 이가 누구입니까?

  공자는 주저없이 안회라고 했다. 안회는 학문을 좋아하고 스승의 말을 잘 따랐다. 총명하고 깨달음이 남달랐다. 그러나 공자가 특별히 안회를 총애하는 이유는 그는 ‘낙(樂)’, 즉 학문의 즐거움을 알기 때문이었다. 


  한소쿠리의 밥과 한포주박의 물로 가난을 견디면서도 도(道)를 찾는 학문의 즐거움을 버리지 않았다.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든, 어떤 집에 살든 전혀 상관이 없었다. 학문의 즐거움을 아는 것이야말로 학문과 도덕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라, 공자는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스승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실천’했다. 어쩌면 공자가 말한 ‘습(習)’,은 학문은 익히고 익히는 게 아니라 실천하는 의미였을 것이다. 배우고 익히기만 하고 도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는 세상을 일찍 떠나고 말았다. 공자는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제자 자공은 공자의 제자 중에 가장 많은 재산을 모은 사람이다. 부가 3대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도 학문을 재미있어 했으니 공자의 문하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학문의 즐거움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그는 정치적인 수완과 청산유수 같은 언변으로 공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예와 도덕을 가볍게 여겼다. 그는 자주 공자에게 꾸지람을 듣곤 했다. 현실감각이 뛰어난 자공은 자부심이 강하고 세속의 예법에 구속되길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하여, 인격과 도량이 공자가 원하는 군자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공자도 그의 재능은 인정해 주었다. 자공은 공자가 세상을 떠나자 6년 상을 치렀으며, 수많은 재력으로 공자를 천하제일의 성인으로 만들어 지금까지 존경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현대 사회에서는 누가 뭐래도 안회는 루저에 속하고, 자공이 각광을 받을게 뻔하다. 안회를 자공 보다 높이 평가한 공자는 다만, 군자란 모름지기 어떤 ‘낙’을 즐거움으로 삼아야하는가를 가르치려 했을 것이다. 어쩌면 자공은 재산을 모으는데서 도를 찾고, 학문을 하는 것 보다 더 즐거웠을지 모른다.


  안회와 자공은 너무나 극명하게 다른 삶을 살았다. 복구자비필고(伏久者飛必高, 채근담), 오래 엎드려 있었던 자 반드시 높이 난다, 하지 않았는가. 29세에 요절한 안회의 수명이 30년만 더 길었더라면 그의 덕망은 빛을 보았을 것이다. 너무 일찍 죽어 업적이나 저서조차 없지만 스승 공자는 그를 최고의 제자라 했다.  

  학문이나 예술을 같다고 봤을 때, 안회와 자공처럼 극명하게 대비되는 인물이 떠오른다. 빈센트 반 고흐와 피카소다. 빈센트 반 고흐는 일생 그림으로 번 돈은 35센트에 불과했다. 남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가난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지만, 애석하게도 안회처럼 일찍 세상을 떠났다. 반면 피카소는 살아생전 그림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으며 장수했다.


  젊은 날에는 당연히 자공의 삶이 훨씬 나은 것 같았다. 그러나 요즘 생활이 단순해지자 왜 공자가 안회를 첫 제자로 꼽았는지 알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일생을 살며 힘든 시기가 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꿈을 접고 생활전선에 뛰어든다. 그리하여 웬만큼 돈을 번 후에 잃어버린 꿈에 대해 한탄한다.


  나 또한 삶의 풍랑을 겪으면서 그마나 이렇게 잡문이라도 쓰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다 집어치우고 돈을 쫒아 갔더라면 참으로 불행한 삶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안회의 삶과 공자의 뜻을 이해할 것 같다.


  사실 안회가 좋은 선례를 남기지는 않았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도 학문에 정진하며 ‘장락무극’을 했어야지 공자의 말발이 섰을 텐데 말이다. 공자 또한 그 시대의 사상가들처럼 자신의 철학으로 나라를 부국 시킬 원대한 정치가의 꿈이 있었다. 그러나 그 꿈은 아주 짧게 끝나고 말았다. 각국의 제후들을 찾아다녔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그쯤 되면 보통사람들은 학문을 버리고 권력자의 그늘로 들어가 호사를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를 키우며 학문의 즐거움을 놓지 않았다.  


  오랜 상담을 하다보면 별별 유형의 사람들이 다 온다. 끝없는 향락을 위해 돈을 버는 사람이 있고, 저승 갈 때 다 지고 갈 듯한 수전노도 있고, 소비를 위한 소비만 하며 남편 등골을 빼는 여자도 있다. 끝없는 욕망으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철새처럼 권력자의 깃발 아래 기어드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굴욕적인 삶을 사는 게 ‘낙’인 줄 착각한다.


  물질적 소비나, 외모지상주의적인 소비에서 ‘낙’을 찾거나, 음주가무나 주색잡기에서 ‘낙’을 찾는다면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게 된다. 아마 패가망신의 지름길일 것이다. 해서, 아직도 공자의 가르침이 이 시대에도 유효한 까닭이다.


  독립불구(獨立不懼, 혼자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돈세무민(豚世無悶, 은둔해 있어도 고민하지 않는다), 할 수 있어야 진정한 도를 알고 내공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루 종일 전화 한 통 오지 않아도 난잎 닦아주며, 난이 꽃대를 밀어 올리는 적요한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 또한 즐거운 요즘이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을 때 ‘낙(樂)’을 느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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