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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타인에게 말 걸기

고단했던 영혼, 부디 평안하시길 빕니다

  2017년 9월 5일 화요일. 

  일과를 마치고 샤워를 하고 나와 습관처럼 텔레비전을 켰다. 그 시간이 대부분 밤 11시쯤이다. 텔레비전은 언제나 뉴스 채널에 맞춰져 있다. 허리를 숙이고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불현듯 허리를 곧추세웠다. 뉴스는 소설가 마광수(향년 66세)의 부고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동작 멈춤 상태에서 그 뉴스를 한 참 보다가 다른 뉴스로 옮아갈 때 쯤 얼굴에 로션을 바르고 머리에 에센스를 발랐다.


  평소 하던 대로 행동을 하고 있지만 어쩐지 허둥댄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개운하지 않는 기분이 뭔지 알 수 없었다. 12시 반까지 채널을 여기저기 돌리며 뉴스만 보다가 자리에 누웠다. 모 출판사에서 러브스토리 시리즈로 마광수를 끼워 내기로 했는데, 마광수가 우울증이 심해 무산 됐다는 소리를 선배에게 들은 기억이 났다. 같이 내기로 했던 또 다른 소설가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결국 선배 혼자만 책을 냈다며, 내게 전해주러 왔었다.  


  - 가끔 새벽 1시에 전화가 오곤 했다. 세상이 너무 무섭다고. 세상이 자신을 아직도 비난하고, 왕따 시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다음 날 만나기로 했는데 도저히 못나가겠다고 해서 결국 못 봤다. 

  지난봄에 선배에게서 들은 말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가로 갔다. 마광수가 내게 사인(sign)해서 보낸 책을 찾았다. 광마일기. 사인을 한 속지에는 1997년 1월이라 적혀 있었다. 난 이 책을 읽었던가? 


  20년 전이다. 어느 모임에 나갔는데 거기에 마광수가 있었다. 저녁을 먹는 내내 마광수는 말이 별로 없었다. 술이 약해 보였다. 첫잔에 붉어진 얼굴이 종당에는 창백하게 변해갔다. 그러나 그는 이따금 안경 너머로 나를 잠깐씩 응시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때 이미 ‘즐거운 사라(1992년)’ 필화 사건으로 한바탕 세상을 뒤흔들어 놓았고, 두 달 쯤 옥살이를 하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 즈음 그는 연세대학교 교수에서 직위 해제되어 시간강사 생활을 했다. 그 ‘외설시비’ 사건은 워낙 파장이 커서 몇 년이 지났는데도 모두들 어제 일어난 일인 것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 저어... 차 한 잔 합시다.

  식당에서 나왔을 때 마광수는 무표정하게, 또한 수줍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난 속으로 몹시 놀랐지만, 태연한 척 후배 둘을 달고 주변의 커피숍으로 갔다. 후배 하나는 이화여대를 나온 화가였고 하나는 묘령의 시인이었다. 다들 말발들이 센 여인들이었다. 차를 마시자고 해 놓고 정작 그는 말이 없었다. 그는 식물처럼 조용했고, 이따금 눈을 들어 말발 센 여인 세 명을 바라보곤 했다. 내가 화장실을 다녀오는 내내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내 전화번호와 주소를 물었다. 나는 전화번호는 적지 않고 주소만 적어 주었다. 그는 그 메모지를 보고 보일듯 말듯 웃은 것 같다.  


  며칠 후 그의 저서 ‘광마일기’가 도착했다. 속지 위쪽으로 정영희 선생님께, 마광수 드림, 1997년 1월, 이라 적혀 있었다. 보통 작가들은 사인을 속지의 아래쪽에다 한다. 그게 안정감도 있고, 어쩐지 마침표를 잘 찍는 느낌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특이하게 위쪽으로 몰아서 했다. 그러니까 속지 아래쪽 80프로는 여백이었다. 위쪽으로 여백이 남아 있는 것과 아래쪽에 여백이 남아 있는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마치 아래쪽의 그 여백은 자신의 삶을 다 살지 못하고 황망히 떠나버린 그의 나머지 삶의 여백처럼 느껴졌다. 


  그의 필체는 멋있었다. 내가 악필이라 글씨체가 좋은 사람을 보면 갑자기 존경스러워진다. 책 표지 그림도 그의 그림이었다. 사실 그는 화가이기도 하다. 그가 화가의 길만 걸었더라면 세상의 돌팔매를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렇게 누드화를 많이 그린 김흥수 화백은 한 번도 외설시비에 회자되지 않았지 않은가. 

  너무 일찍 성(性) 담론을 들고 찾아온 심약한 천재를 우리는 ‘변태’라고 낙인찍었다. 그런 사회적 흐름에 나 또한 공범의 혐의가 없었다고 잡아뗄 수 없다. 하여 그 때 난 전화번호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 전화번호를 줬으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고, 그랬다면 그가 저렇게 외롭게 세상을 떠나진 않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음란물, 옥살이, 해직, 왕따, 병고, 생활고, 외로움, 우울증... 넥타이가 아니라 스카프로 목을 맸다는 게 의미심장하네요... 뉴스에서 들었던 단어와 말들이 뒤숭숭하게 잠자리를 어지럽혔다. 나는 다시 일어나 광마일기를 펼쳐 작가의 말을 읽어 내려갔다.


  마광수 말고 또 한 사람에게 난 악착같이 전화번호를 주지 않은 적이 있다. 이 일도 20여  년 전이다. 그 때 나는 지금의 강남 롯데 백화점 앞에 있는 아파트에 살았다. 그 때 강남 롯데는 ‘그랜드 백화점’ 이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누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 청바지를 사러 가는데 혹시 리바이스 매장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경상도 억양이 살짝 섞인 말투였다. 나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세상에 내게 말을 건 사람은 영화배우 ‘김추련’이었다. 이미 전성시대가 한참 지난 그를 나는 단박에 알아보았다. 


  대학교 일학년 때 본 영화 ‘겨울여자(1977년: 김호선 감독, 1975년: 조해일 원작)’에서 신성일과 함께 주인공으로 나온 배우였다. 자신을 사랑한 남자는 자살을 하고, 자신이 사랑한 남자는 군대에서 사고로 죽게 되자, ‘이화(장미희 분)’는 죄책감과 충격으로 자신의 육체가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 급기야 자신을 원하는 모든 남자에게 자신의 몸을 주겠다는 결심을 한다. 순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이화’는 상처 받은 남자를 만나면 육체로 치유해 준다. 나중에는 정신지체아 학교의 선생님이 되어,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간다.


  그는 이 영화에서 이화가 사랑한 대학생 기자 ‘석기’역할을 했다. 당시 이 영화는 여성의 성모럴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로도 그의 전성기는 한참 이어졌다. 영화가 동시 녹음을 시작하면서 그는 스크린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는 그가 주로 에로영화에 많이 나온 것 같다. (에로 영화만 골라 본 건 아니다.) 식육점처럼 붉은 조명이 비치는 침대 위에서의 어색한 정사신은 그 때의 내게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겨우 벗은 상체정도만 보여 줬는데 말이다.  


  - 4층이나 5층에 있을 겁니다.

  나도 리바이스 매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 지 못했다.

  - 저어... 저랑 차 한 잔 하시겠어요?

  청바지를 사러 왔던 김추련은 느닷없이 내게 차를 한 잔 하자고 했다. 지금은 웃기는 얘기로 들리겠지만, 그 당시만 해도 데이트 신청을 할 때는 언제나 차 한 잔 하자는 걸로 타인에게 말을 걸었다.

  - 어머나, 아니예요.


  나는 마치 에로 영화 속의 불결한 남자가 내게 다가오기라도 하는 양 기겁하며 거절했다.

그는 황망히 걸어가는 나를 조금 놀란 눈으로 멍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얼마 후 백화점 안에서 또 그와 마주쳤다.

  - 저기요... 전화번호라도 가르쳐 주세요.

  - 어머나...

  나는 귀신이라도 본 듯이 놀라 총총히 그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왜 그렇게 그를 두려워  했을까. 순간적으로 영화 속 그와 현실의 그를 동일 인물로 생각했던 것일까. 마흔 언저리면 어린 나이도 아니건만, 나는 왜 그렇게 사람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대했을까. 


  그로부터 십여 년 후인 2011년, 역시 그의 부고도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칠팔십 년대 청춘스타였던 영화배우 김추련씨가 경남 김해시 한 오피스텔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는 기사였다. 그가 독신이었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당뇨병과 고혈압과 우울증과 생활고와 외로움... 그의 사인(死因)을 알리는 단어들이었다.


  ‘광마일기’를 펼쳐 작가의 말을 읽어 내려가다, 오래전 삶을 버린 영화배우 김추련을 떠올렸다. 그들은 비슷한 나이에 죽었고, 사인도 비슷했고 죽음의 방식도 같았다. 스쳐지나가는 인연이었지만 어쩐지 그들의 죽음을 방기(放棄)한 느낌이 들었다. 그 때 그들이 어렵게 타인에게 말을 걸었을 때, 전화번호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주지 않았는지. 그랬다면 적어도 말벗이 되어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최소한 따뜻하게라도 대해줄걸 하는, 때늦은 후회가 일었다. 


  - 타인에게 친절 하라. 그대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지금 그들의 삶에서 아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플라톤).


  아무리 좋은 명언을 줄줄이 꿰고 있으면 뭣하나, 행동은 언제나 명언보다 한 발 빨라 ‘후회의 신’이 미소 짓게 하지 않는가. 이 글을 빌어 오래 전 두 분에게, 아니 그 동안 알게 모르게 친절하게 대하지 못했던 모든 분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고단했던 영혼, 부디 평온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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