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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내 친구의 화양연화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말한다

  드디어 만났다. 그래봐야 햇수로 2년만이다. 그녀가 인천으로 이사한 이후로는 일 년에 한 번쯤은 꼭 만난다. 지난여름부터 만나자고 했으나, 지난여름은 가혹했다. 그 가혹한 무더위를 견디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지쳐있었다. 결국 또 해를 넘기고서야 만났다. 여고 때부터 보아 온 오랜 친구다. 이순 중반을 넘겼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여고 때의 얼굴 그대로다. 

  약속한 일식당 복도에서 마주친 그녀와 손은 잡고 소녀처럼 뛰었다. 살아있는 그녀가 너무 기뻐서. 그녀는 남편과 같이 왔다. 후덕한 남편은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반갑게 웃어주었다.

  뽀얗고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끼고 언제나 생글생글 웃는 게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다. 고등학교 졸업 미전을 같이 했고, 각기 다른 미술대학을 갔지만, 꽃꽂이를 같이 배웠다. 대학 2학년 때는 호텔에서 한복을 입고 꽃꽂이 전시회도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일본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일본여자였다. 그 당시 그녀의 가족은 아파트에 살았다. 마당 있는 집에만 살던 나는 아파트를 처음 알았다. 그 당시 우리 집에도 냉장고와 세탁기는 있었지만, 카페트를 청소하는 청소기는 없었다. 카페트도 처음 봤고 미제청소기도 그녀 집에서 처음 봤다. 50여 년 전 이야기다. 미술 도구도 전부 일본제품을 사용했다. 그녀는 일본제 톰보 4B연필을 친구들에게 나눠주고는 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연락이 끊어졌다. 임신과 출산과 독박육아. 삶의 토네이도에 휘말려 각자도생하느라 서로의 생사를 확인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이 키우며 대학 다니는 시동생 시누이와 5년 쯤 같이 살았다. 아이 아빠는 산업역군까지는 아니지만 나라 발전을 위해 밖으로만 나도는 세월이 길고, 길었다.

  내 존재는 광야의 촛불 같았다. 훅, 한 번의 호흡에도 꺼져버릴 것 같은 희미하고 가물가물한 촛불. 춥고 어둡고 바람 부는 벌판을 작은 소녀가 혼자 타박타박 걸어가는 환영에 오랜 시간 시달렸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내 존재를 증명해야 하나. 내 속에 우글거리고 다니는 문장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숨을 쉴 수 있으니, 어떤 상황에서도 살 수 있는 거다.

  강남세브란스 병원 옆 아파트에서 20년을 살았다. 매봉터널은 아들의 놀이터였다. 아들이 중학교 2학년 때 외환위기가 왔다. 아이 아빠는 중국으로 갔다. 그때부터 혼자였던 것 같다. 혼자 매봉산을 오르내리며 그 아파트에서 여러 권의 장편소설을 썼다. 펄렁한 원피스 잠옷 위에 앞치마를 하고 책상과 싱크대를 오가며 살았다. 글을 쓰거나 요리를 하거나. 아들이 대학에 들어갈 때 쯤, 더 이상 그 집에서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디로 갈 것인가. 그 때 생각난 게 그녀였다. 그녀는 어떻게 살고 있나? 

  그녀를 찾는 데는 5번의 짧은 통화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놀랍게도 지척인 성남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마흔 중반이었다. 그녀는 다음 날 당장 내가 사는 아파트로 달려왔다. 거의 20년만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변한 게 없었지만, 삶의 파도는 그녀를 그냥 두지 않았다. 그녀가 결혼도 하기 전에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고, 사업체의 돈은 밑의 직원들이 이미 다 빼돌린 상태였다고 했다. 그나마 양심 있는 아버지 운전기사가 차 팔은 돈 오백만원을 줘서 작은 주공 아파트를 사서 일본인 어머니와 남동생 3명과 같이 살 수 있었다고 했다. 어찌어찌 결혼을 해서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남편이 바람이 났고, 헤어졌다. 그녀는 아이 둘을 데리고 성남에서 식당을 하고 있었다. 

  여자 혼자 아이 둘을 키우는 일은 만만찮다. 처음엔 우동 집을 했다가, 고기를 파는 집으로 업종을 바꾸었다. 그 때 식당에 밥 먹으러 오던 남자가 지금의 남편이 되었다. 아이들이 자라 딸은 결혼을 하고 아들은 독립을 했다. 이제 한숨 돌리는가 했더니 유방암(3기)이 찾아왔다. 유방과 임파선을 절제하고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받는 힘든 투병생활을 했다. 5년 후 완치 판정까지 받았다.

  - 영희야 나는 요즘이 제일 좋다. 젊은 시절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눈가가 촉촉했다.

  - 지금이 니 인생의 화양연화네. 

  우리는 또 손을 잡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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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는 화양연화가 언제였노?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선배가 며칠 전, 문자로 물었다. 투명한 벽에 부딪친 듯 잠시 멍했다. 나의 화양연화라.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말한다. 일찍이 왕가위 감독(2000년)이 만든 영화 제목이다. 비켜지나가는 아프고 슬픈 사랑을 첼로음이 묵직하게 깔리는 ‘유메지의 테마’곡과 냇 킹 콜의 스페인어 노래 ‘키싸스 키싸스’을 삽입해서 만든 명작이다. 첼로음이 관능적인 슬픔을 머금고 있는 선율은 언제 들어도 가슴을 아리게 한다.

  세상이 너무 소란스럽다. 45년만의 비상계엄(윤석열, 2024.12.3)선포와 27년만의 대형여객기 사고(무안공항, 2024.12.29)의 여진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돌아보면 내 인생에 한 번도 태평성대인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 거리에는 거지들이 우글거렸고, 고등학교 시험은 희대의 입시부정사건으로 진눈깨비에 발목을 빠져가며 두 번을 쳤고, 뒤늦게 찾아온 고등학교 시절의 사춘기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느라 책과 사색에 빠져 혼자 걸어 다닌 기억밖에 없다.

  대학에 들어가자 유신계엄으로 공부를 제대로 한 기억이 없다. 대학교 3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이 비극적 종말을 맞았고, 대학교 4학년 5월 18일, 나는 교생실습 중이었다. 5,6공 군사정권 동안 아들을 업고, 불꽃처럼 민주화를 외치며 분신(焚身)하는 젊음을 바라봐야 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오랜 시간 이어졌다.

  문민정부(김영삼 대통령)에서 국민의 정부(김대중 대통령)로 다시 참여정부(노무현 대통령)로 이어지며,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 와중에 거대한 외환위기(IMF)라는 파도를 만나기도 했다. 그 파도에 떠밀려 강남에서 성남으로 다시 오포로 갔다가 다시 성남에서 산다. 그 동안 책을 10여권 출간했다. 유방암은 아직 2년차 환자다.

  나의 화양연화는 언제인가.

  유방암 수술하기 전 날 밤이었다. 잠이 올 리가 없다. 한남동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평온하다니. 내일 죽어도 괜찮겠구나, 싶었다. 생각해보면 돈을 벌려고도 유명해지려고도 글을 쓴 게 아니었다. 사는 게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가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그 수단이 글쓰기였던 것이다. 책을 한 권씩 쓸 때마다 손톱만큼씩 내 ‘화두 도장깨기’였다. 인간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밥을 굶은 적 없고, 누구에게 구걸한 적도 없다. 물론 혈육의 도움은 받았다.

  어느 날 문득 이 모든 고통이 집착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그 갈애(渴愛)를 놓는데 60년이 걸렸다. 더 이상 인간에게서 구하지 않으니, 간신히 평화가 찾아왔다. 그 깨달음은 인간에게 국한되는 게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인연과도 시절인연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돈오(頓悟)의 순간이다. 그러나 점수(漸修)의 과정은 길고도 길 것이다. 억겁을 두고 이루어질 것이다. 수행이란 실패의 연속이다.

  간신히 외롭지 않고, 간신히 부럽지 않고, 간신히 평화롭고 자유롭다. 이만 하면 지금이  나의 화양연화가 아닐까. 내일 죽어도 괜찮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인연으로 이루어진 몸, 죽으면 다시 지수화풍으로 흩어져 우주의 에너지로 변할 것이다. 이 지구에 머무는 시간동안, 같이 걸어와 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의 이시국도 지나갈 것이다. 인류에게 성스러운 군주가 다스리는 태평성대란 없다. 백성이 마음의 방향을 바꿔 평상심을 유지하는 수밖에.

  - 선배님, 저는 지금이 제 인생의 화양연화입니다.

  선배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 친구의 화양연화도 지금이랍니다. 이글을 읽는 당신의 화양연화는 언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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