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노트⑫]남양주 봉선사 운허와 이광수
광릉숲 옆에 자리한 봉선사의 첫 인상은 젊음이다.
한글로 적은 ‘운악산 봉선사’라는 일주문 현판이 순례자를 반긴다.
연꽃 가득한 연못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맑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올 듯한 ‘청풍루’가 나오는데, 그 입구에 서 있는 ‘스키점프를 하는 스님 모형’이 여느 사찰과는 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디지털 불전함’이라고 적힌 보랏빛의 키오스크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데 현금은 물론 카드와 페이로도 시주할 수 있단다.
무엇보다 봉선사의 백미는 대웅전, 아니 ‘큰법당’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전각으로 보통 ‘대웅전’이라고 한자로 편액을 써 놓기 마련인데, 봉선사는 다르다. ‘큰법당’이라고 적은 한글 현판이 새롭게 다가온다. ‘큰법당’ 4기둥에 걸린 주련도 한글로 적혀있다.
불교 대중화의 뜻을 담은 상징인데, 우리나라 사찰의 한글 편액으로는 이것이 처음이란다.
"단정하면서도 원만한, 보는 이들이 모두 좋아할 글씨"라고 봉선사는 자부하는데, 한글 편액은 1970년 ‘큰법당’을 중건할 때 주지였던 운허스님(1892~1980)의 뜻이라고 한다.
운허 스님은 속명은 이학수로 189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청년기에는 일제의 침략에 당당히 맞선 항일투사, 종교인으로서는 불경의 번역가, 교육자로서는 후학의 양성에 전념한 분’이라고 봉선사는 소개한다.
3.1운동 직후엔 만주에서 독립군정기관지인 한족신보를 간행했고, 1920년에는 독립운동기관인 광한단을 조직해서 활동했다. 또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우리말을 통한 민족정신의 고취가 중요하다며 불경의 한글화에 힘을 쏟았다.
『한글금강경』과 『불교사전』을 펴냈고 불경을 한글로 옮기는 동국역경원을 1964년 세워 초대원장을 지냈다고 한다. 1962년 문화훈장 국민장을 받았고 1991년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그런데 운허스님 부도탑 옆을 걷다 보면 역사 속 인물의 기념비가 하나 서 있다. 국내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춘원 이광수 기념비. 1976년 세워졌는데 운허스님과의 인연이 큰 역할을 했다.
1917년 최초의 근대 소설인 무정을 발표해 문학적 성취를 이뤘고, 도쿄 2.8 독립선언문 기초를 닦았으며,상하이 임시정부의 ‘독립신문’을 맡아 펴내는 등 독립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했던 춘원 이광수(1892~1950).
문학 뿐만 아니라 계몽사상에도 밝아 1930년대 도산 안창호 선생(1878-1938)과 흥사단 활동도 함께 했는데, 운허스님과는 8촌간이다.
1892년 3월 평북 정주에서 20여일 차이로 태어난 두 사람. 어려서 가난했던 춘원은 운허의 집에서 함께 생활해 두 사람은 형제 이상의 관계였다.
태어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춘원과 가장 많이 접촉한 이가 운허스님이라는 평가도 있다.
한 사람은 문학가, 한 사람은 승려로서 추구하는 길은 서로 달랐지만 1930년대 중반까지 독립을 위한 헌신, 우리말에 대한 사랑으로 비슷한 운명을 걷는 듯 했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 이후 춘원과 운허 두 사람의 길은 엇갈린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됐던 춘원은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받은데다, 1938년 3월 정신적 지주였던 도산 안창호 선생까지 숨지자 방황하기 시작했고 친일의 길로 접어든다.
춘원은 이미 자신의 변절을 예견한 것일까? 1938년 3월 1일에 지었다는 춘원의 시 「내 죄」의 한 구절이다.
「내 가만이 자리에 누워
세상사람들의 죄를 생각하다가
내 죄에 눈이 띠어
소스라쳐 놀랐나이다.
내 입으로 지은 죄는 바다와 같사옵고,
몸으로 지은 죄는 산과 같사옵고
마음으로 지은 죄는 허공과 같이 끝간 데를 모르나이다.
……(중략)……
아모러한 불로도 사를 수 없고
아모러한 물로도 씻을 수 없고
아모러한 바람으로도 날릴 수 없사오메,
오직 땅에 엎드려 뉘우치는 눈물을 쏟힐 뿐이로소이다.」 -무인년 3월 1일
이후 춘원은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면서 일제에 협력하고, 대한 청년들을 일제의 명분 없는 전쟁에 총알받이로 보내기 위한 징병 작업에도 적극 나선다.
광복 후 반민특위는 친일 행적을 상세히 조사해 춘원을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다. 춘원은 비록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지만.
운허의 도움으로 광릉에서 교편을 잡다 6.25때 납북된 직후 숨져 북한에 묻혀 있는 춘원 이광수.
그의 문장처럼 “마음에 항상 추잡과 오예(더러움)가 그득하기 때문에 청정을 사모하는 정이 간절“했지만, 역사적 과오로 근대문학의 선구자라는 향기로운 이름을 후대에 온전히 전하지 못한 건 그의 업보 때문은 아닐지….
불교에 깊이 감화한 춘원. 부처님 가르침을 쉽게 풀어냈다는 그의 시로 글을 마무리한다.
「애인(愛人)
임에게는 아까운 것이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포시(布施)를 배왔노라.
임께 보이자고, 애써
깨끗이 단장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지계(持戒)를 배왔노라.
임이 주시는 것이면
따림이나 꾸지람이나 기쁘게 받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인욕(忍辱)을 배왔노라.
천하 하고많은 사람에 오직
임만을 사모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선정(禪定)을 배왔노라.
자나 깨나 쉬임 새 없이
임을 그리워 하고 임곁으로만 도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정진(精進)을 배왔노라.
내가 임의 품에 안길 때에
기쁨도 슬픔도, 임과 나와의 존재(存在)도,
있을 때에 나는 살바야(薩婆若)를 배왔노라.
인제 알았노라.임은
이 몸께 바라밀(波羅蜜)을 가르치라고,
짐즞 애인(愛人)의 몸을 나툰 부처시라고.」
///TOK///
*이 글에서 인용한 춘원 이광수의 문장과 시는 <이광수,『춘원시가집』, 박문서관판, 1940>(온이퍼브,2017년 펴냄)에서 원문 그대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