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노트⑬] 고창 선운사 동백과 백파율사비
6월 하순 선운사는 녹음이 울창하다.
숲길을 걷다보니 맨발로 건너면 발이 시려서 아릴 것 같은 투명한 계곡물이 나온다. 계곡은 거울처럼 풍경들을 그대로 비쳐낸다. ‘시인이 결코 허투루 한 말은 아니구나’ 생각하다보면 천왕문에 다다른다.
사찰 경내로 들어가기 전 지나가야 하는 사실상의 마지막 검문소 격인 천왕문.
동서남북의 하늘을 나눠 맡아 관리하는 4명의 천왕이 순례객을 맞이한다. 부릅뜬 눈에 우락부락한 얼굴에선 방문객을 일일이 심사하겠다는 의지가 읽히기도 하지만, 또 어찌 보면 귀여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비파나 칼, 탑 같은 각자의 도구를 갖고 중생과 절집을 지키는 임무 탓에, 천왕의 발밑엔 이 곳을 몰래 지나려던 악귀들이 깔려 신음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선운사 천왕문을 유심히 보면 조금 다른 군상들이 눈에 띈다.
큰 칼을 든 천왕 무릎 아래를 유심히 보니 웬 아낙네가 토라진 듯 눈을 흘기며 천왕 쪽을 째려본다.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천왕에게 걸렸을까?
천왕의 묵직한 체구에 짓눌릴 법도 하지만 아낙네의표정을 보면 ‘잘못도 없는데 왜 나만 절 문턱조차 넘지 못하게 붙잡고 있느냐‘고 시비 거는 듯하다.
용을 쥐고 있는 천왕의 오른쪽에는 한 관리가 어정쩡한 자세로 천왕의 다리에 손을 대고 무언가를 하소연하는 표정으로 서 있다.
제발 부처님 얼굴을 한 번만 뵙게 해 달라고 거래라도 하려는 걸까? 천왕께 뒷돈이라도 줘서 곤란한 처지를 모면하려는 걸까? 조금은 애절한 눈빛 같기도 하다.
마지막 검색대인 천왕문에서 잡힌 붉은 옷의 아낙은 행실이 올바르지 못한 ‘음녀’이고 머리에 모자를 쓴 사람은 ‘탐관오리’란다.
한국적 특징이 잘 나타난다고 선운사는 설명하는 데 해학적인 모습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기도 한다.
천왕문을 지나 대웅보전,지장전,영산전을 둘러보고 나면 커다란 동백나무숲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3천 그루의 동백이 16,500㎡, 5천평 규모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천연기념물 181호다.
선운사는 동백이 서식할 수 있는 북방한계선이다. 여기에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일까?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가객들은 이곳을 그냥 두지 않았다.
한 가객은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을 보면 떠나려는 님이 혹시라도 곁에 남지 않을까 생각했고,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송창식, 「선운사」중 일부>
한 시인은 떠난 여인 때문에 꾹꾹 참았지만 선운사에서 끝내 통곡하고 말았단다.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 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김용택, 「선운사 동백꽃」, 1998>
그런데 ‘나무에서 피고, 땅에서도 피는’ 동백이 선운사에서 유독 ‘사람의 가슴 속’에서 피는 3번째 모습을 잘 보여주는 걸까? 60년 전 시인의 싯구가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읍디다.
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습디다.」 <서정주, 「선운사 동구(洞口)」, 1968>
초여름 동백의 푸르름만 보게 돼 아쉬운 마음을 안고 절에서 나오는데, 길 왼쪽 부도밭이 눈에 들어온다. 네모 문틀에 연꽃 모양으로 입구를 만들어 놓았고, 백파율사비가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백파 대율사(1767∼1852). 법명은 긍선(亘璇)으로, 화엄종주로 존경받는 대강백이자 선승이다.
50세 때 『선문수경』이라는 책을 지어 추사 김정희(1786~1856), 초의선사(1786∼1866)와 논쟁을 펼쳤다. 이후 논쟁이 100년 동안 계속됐다고 하니 치열하고 또 치열했던 모양이다.
평범한 순례객이 쟁점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고담준론 속에 서로를 찌르는 비수 같은 말들이 오갔을 것이고, 때로는 시정잡배가 쓰는 속된 언사도 나왔을 거다. 추사가 쓴 ‘백파망증 15조’엔 거침없고 신랄한 표현이 담겨 있어 옮기기도 조심스럽다.
그랬던 그들이 백파가 입적한 이후엔 서로에 대한 존중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백파의 제자들은 추사를 찾아 스승의 비문을 부탁했고, 추사는 흔쾌히 수락하고 글과 글씨로 백파를 추모한다.
추사는 비문에서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알고 있을 따름이다. 비록 만가지 방법으로 입이 쓰도록 사람을 설득하려해도 모두 깨닫지 못하니, 어찌하면 백파를 다시 일으켜 서로 마주보고 한번 웃어볼 수 있을 것인가!(惟坡與吾知之.雖萬般苦口説人,皆不解悟者,安得再起師來,相對一笑也.)”라며 치열한 논쟁을 반추하고 있다.
그리고 일생의 논적이던 백파의 비문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가난하기는 송곳 꽂을 자리도 없었으나
기상은 수미산을 덮을 만하도다
어버이 섬기기를 부처님 모시듯 하였으니
그 가풍은 정말로 진실하도다.
그의 이름은 긍선이니
나머지야 말해 무엇하리오.
완당학사 김정희가 찬하고 또 쓰다.
(貧無卓錐,氣壓須彌.事親如事佛,家風最真實.厥名兮亘璇,不可説轉轉. 阮堂學士 金正喜 撰并書.)
백파 율사비는 1858년에 세워졌는데, 비문 글씨는 추사가 별세하기 1년 전인 1855년에 쓴 것으로,
추사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최고의 명작으로 평가된다.
죽일 듯이 논쟁했지만 서로에 대한 깊은 존중과 인정,포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백파율사비.
거기에 완성체에 다다른 ‘명품’ 추사체를 보는 기쁨까지, 그들이 후손에게 남겨 준 훌륭한 선물이다.
///TOK///
*주) 백파율사비 비문글씨와 해석은 <향토문화전자대전>, ‘선운사 백파율사비’를 참고했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579049&cid=51945&categoryId=54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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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건립일자 글씨와 완당학사 김정희라는 글씨는 추사가 쓴 게 아니라 다른 이가 대필한 것이라는 고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