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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욱 Sep 13. 2024

미륵 ‘네 컷’…졸작에서 파격·대범으로

[순례노트⑭]논산 관촉사와 은진미륵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10km가량 떨어진 반야산 중턱에 관촉사가 있다.  해발 100m의 낮은 산이지만 평야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올라가면 시야가 탁 트인다.   


일주문을 지나 계단으로 경내로 올라갈 수도 있지만 오른쪽으로 가면 작은 돌기둥으로 된 석문이 나온다.

관촉사 석문 '해탈문'

해탈문.


부처님 세상에 들어가기 전에 머리를 숙이고 겸손하라는 의미일까? 좁고 낮은 해탈문으로 들어가면 거대한 불상이 순례객을 반긴다.     

 

국보 제323호 석조미륵보살입상. 은진미륵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높이 18.12미터에 둘레 9.9미터, 무게는 377톤이라고 한다. 국내에서 가장 큰 미륵불이다. 아파트 6층 높이라고 하니 그 높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은진미륵 앞에는 석등이 있고 부처님께 기도를 올릴수 있는 배례석도 마련돼 있다. 길이 204㎝, 너비 103㎝,높이 40cm의 바위에 3개의 연꽃 문양이 아주 실감나게 조각돼 있다.  

관촉사 배례석

은진미륵이라는 큰 석불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미륵전에 그린 ’네 컷’이 제작설화를 보여주고 있다.  

    

①한 여인이 반야산에서 우는 소리를 듣고 가보니 아이 대신 큰 바위가 솟아남.

②고려 광종이 혜명대사에게 바위로 불상 만들라고 지시, 36년 공사로 완성.

관촉사 미륵전 외부에 그려진 제작 설화. 그림①과 그림 ②

③불상 세우는 게 최대 난제. 동자들이 세 토막 진흙 불상을 모래단을 쌓아 '기립'하는 걸 보고 해법 찾음.

④불상이 세워지자 서기(瑞氣)가 21일 동안 서렸고, 부처님 얼굴에서 빛이 나와 사방을 비춤.     

관촉사 미륵전 외부에 그려진 제작 설화. 그림③과 그림④

실제로 은진미륵은 천연의 암반 위에 허리 아랫부분과 상체 머리 부분을 각각 하나의 돌로 조각해 이어 붙였다. 바닥에서 어깨까지 11.6미터, 어깨에서 보관까지 4미터, 보관높이 2.4미터 정도이며 귀는 1.8미터, 입은 1미터가 조금 넘는다고 한다.     

관촉사 은진미륵 정면

그런데 은진미륵의 생김새를 두고 오랜 세월 논란이 일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 미술사학자 세키노 다다시(1867~1935)는 은진미륵을 “전체적인 균형미가 없다. 머리 부분이 지나치게 크고 면상이 평범하며 의상의 수법이 간결하다”고 평가했다.


이런 혹평도 있었다. 그것도 한국 고고학과 미술사학을 개척한 김원용(1922~1993)교수의 평가여서 파급력은 엄청났다.


“은진미륵은 3등신의 비율이며, 전신의 반쯤 되는 거대한 얼굴은 삼각형으로 턱이 넓어 일자로 다문 입, 넓적한 코와 함께 불상의 얼굴을 가장 미련한 타입으로 만들고 있다. 실체는 한 개의 석주(石柱)에 불과하고 그 위에 의미 없는 선이 옷 주름을 표현하려고 한다. …신라의 전통이 완전히 없어진 한국 최악의 졸작이다.

이 미륵에 한국인이 놀라는 것은 그 크기 때문일 것이고, 외국인이 감탄한다면 그 원시성 때문일 것이다.”<김원용, 『한국미의 탐구』, 열화당,1978>(신동아,2022.10.9 재인용)


한마디로 무척 괴이하게 생겼다는 거다.

하지만 고려때 미륵불을 신라의 미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반박이 나온다.


신라의 불상은 미소를 머금거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근엄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은진미륵은 ‘무언가 신기(神奇)를 일으킬 것만 같은 괴력의 소유자로서민간신앙으로 남아있던 장승의 이미지를 불교적으로 번안한 토속성이 보인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옛 백제 땅에 살던 사람들은 숨막힐 듯 짜여진 질서가 아니라 차라리 그 질서를 파괴하는 힘, 괴력과 신통력의 소유자인 부처님이어야 민중도 뭔가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유홍준,『나의 문화유산답사기6』,창비,2011.p.408~409>     

옆에서 본 은진미륵

여기에 은진미륵 건립이 ‘왕권 강화를 위한 고려왕의 계획’이라는 새로운 시각이 더해지면서 은진미륵에 대한 갑론을박은 더 깊어진다.


“제왕이 공식적인 행사에서 쓰는 면류관은 왕을 상징하는데 이 세속적인 의미의 면류관을 왜 보살상이 쓰게 되었을까? 또 어째서 중앙에서 파견된 승려 조각장 혜명이 제작했을까, 그것도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후백제 지역에 조성했을까?”라는 의문에 대해 “중앙집권의 기초를 다지는 정책 차원에서 논산에 세운 상”이며 “그것도 고려전기를 대표하는 불상”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최선주,『박물관 큐레이터로 살다』,주류성,2022.p.15-16>  

고려 광종은 창업주 왕건이 사망한 이후 취약했던 왕권을 강화하려고 한 개혁군주다. 과거제와 노비안검법 도입은 기득권 세력을 누르기 위한 대표적 개혁조치다.


광종은 소외된 지방 호족과의 연대를 통해 왕권강화를 추구했으며 이를 위해 전략적 요충지인 옛 후백제 땅인 은진지역에 거대한 보살상을 조성했다는 거다.


왕이 쓰는 면류관 형태의 보관이 등장한 것은 왕이 직접 이 땅을 다스리고 있다는 인식을 미륵불을 통해 백성들에게 심어주려 했던 일종의 장치 아니었을까?

이런 논쟁 때문이었을까?


기존 시각을 뒤집는 견해가 제시되면서 미적 가치도 재평가됐으며, 급기야 '못난이 부처님' 은진미륵은 2018년 2월 그 처지가 180도 바뀌는 인생 역전을 맞이하게 된다.   


국보심의회의에서 문화재 위원들이  “중후하고 역강한 힘을 느낄 수 있는 조형미를 갖췄고 통일신라와는 완전히 다른 파격과 신비의 미적 감각을 담은 가장 독창성 짙은 불교 조각”이라며 만장일치로 국보로 승격지정한 것이다.<경향신문,2020.8.25>


1963년 보물에서 2018년 국보가 된 은진미륵.     

‘최악의 졸작’에서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을 보이는 새로운 양식’이라는 하늘과 땅 차이가 나는 평가를 받기까지 적어도 55년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T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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