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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D Aug 01. 2024

꺽새끼 (2)


전편에서 가장 큰 오류가 있었다.ㅋㅋㅋㅋ 할아버지는 고등학교 선생님 시절 할머니를 만난 게 아니라 장교 시절 만났다 하셨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외가 쪽 증조할머니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5.

어린 시절 증조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항상 한복을 입고 다니셨고 외할머니 집에 오시는 날이면 으레 KFC 치킨 한 박스를 챙겨오셨다. 아마 증손주인 내 입맛에 맞을 거라 생각해서 그러셨던 거 같다. 꽤나 오래 장수하셨다. 내가 초등학생인가 중학생인가에 돌아가셨으니 거의 백 년을 살다 가셨다. 증조할머니는 과부셨다. 625전쟁 중 소련군에 의해 증조할머니 가족이 보는 앞에서 끌려가 무참히 총살 당하셨다 했다. 외할머니는 지금도 그 장면이 꽤나 생생하다고 하신다. 외할머니가 맞이였고, 둘째는 삼촌할아버지, 셋째 넷째가 있었고 다섯째가 이모할머니다. 셋째 넷째는 외할머니가 아마 초등학생 무렵 겨울 홍역이 크게 돌아 죽었다고 한다. 겨울에는 땅이 꽁꽁 얼어서 도저히 파지질 않아 땅에 묻어주지도 못했고 외할머니가 직접 멍석으로 말아서 산에다 적당한 곳에 그냥 두고 오셨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그 모든 과정을 다 지켜보셨고 그 기억에 꽤나 생생하다고 하신다. 나머지 삼촌할아버지나 이모할머니는 너무 어려서 기억이 안 난다고 하셨다.



6.

증조할머니는 과부가 되었고 문래동 시장 쪽에서 밑바닥부터 일을 시작하셨다. 한복, 이불 쪽으로 장사를 시작했는데 당시 산업화와 맞물려 수요도 꽤 많고 상당히 잘나가게 되셨다. 증조할머니의 시댁 가족은 증조할머니가 과부가 되신 거에 많이 마음 아파하셨고 할머니의 삼촌들이 증조할머니를 많이 케어해주셨다고 들었다. 삼촌들이 영등포 지역에서 꽤 유명한 오야붕이었다나. 나쁜 쪽은 아니고 꽤 주먹으로 유명한 분이셨다고 들었다. 그래서 혹시나 증조할머니가 시장에서 험한 일 당하거나 하면 든든하게 뒤를 지켜주셨다고 하셨다. 무튼 증조할머니는 한복과 이불 장사로 상당히 잘나가셔서 당시에 문래동에서 꽤 큰 기와집에 살았다고 한다. 방도 많아서 셋방도 줬다고 한다. 그 셋방에! 외할아버지가 장교 시절 서울 근무할 때 살았었고 그때 외할머니를 만나 결혼하고 첫째 (큰삼촌)가 태어났다고 하셨다.



7.

이후 할아버지는 강원도 철원으로 발령 났고 둘째인 엄마는 거기서 태어나셨다. 전역 후 다시 서울로 돌아오셨고 그때 막내인 작은 삼촌이 태어났다. 전역 후 서울로 돌아와서 바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할아버지가 몇 달은 백수 상태로 지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피난민으로 항상 빠듯하게 살아오셨기에 변변찮은 형편이었지만 외할머니는 증조할머니 덕에 꽤나 유복하게 자랐고(할머니가 고등학교 시절엔 같은 반 친구들에게 빵 사주기도 했다고 함) 할아버지가 일자리 못 구하실 때 많이 지원해 주셨다고 한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신광여고 국어선생님 자리를 얻어 이후 30년을 일하셨다. 근데 또 교사 일도 들어보니 참 험난하셨다. 당시 60년대 이후로는 인구가 폭증할 시기라 어머니 때 신생아는 아마 80만인가 그랬고 작은 삼촌 때는 신생아가 110만인가 그랬다 한다. 그래서 당연히 학교에서도 학생들이 미어터졌고 학교에서는 지원받는 대로 가건물 증축하느라 바빴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학교 선생님들도 수업 시간 외에는 바로 작업복 입고 벽돌 날랐다고 한다. 우리 할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셨다. 



8.

증조할머니는 교육에 대해 본인의 기준이 있으셨다. 여자는 고등학교까지만. 외할머니는 당시에 곧잘 공부를 잘하셨고 무엇보다 미술 쪽에 재능이 꽤 있으셨다. 그래서 공부, 특히 미술 공부를 하고 싶어 했는데 증조할머니가 막으셨다. 이후 대학 진학하고 싶다고 울며불며 거의 일 년을 설득했지만, 한복과 이불 장사로 충분히 재력도 있으셨지만 못하게 하셨다. 나중에 할머니가 결혼하고 고생하시며 사는 걸 보고 그때 증조할머니가 정말 많이 후회된다고 미안하다고 할머니께 사과하셨다고 한다. 



9.

다시 할아버지 얘기로 돌아와서, 엄마랑 삼촌 둘은 다들 착하고 바르게 컸지만 공부 쪽은 크게 재능이 없었다. 그래서 셋 다 학교를 엄청 잘 가지는 못했다. 할아버지는 고등학교 선생님을 오래 하며 고3 진학반도 여러 번 맡았으니 아마 대학 타이틀에 대해 가슴 한편 아쉬워하셨던 거 같다. 손주 세대에서 내가 유일하게 SKY를 진학하게 되었다. 다른 친척들도 다들 착하고 바르게 컸지만 공부 쪽은 크게 재능이 없었다. 그래서 입학할 연도에 할아버지가 날 붙잡고 엄청 기뻐하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 난 이미 어플로 어디서 환승해서 학교 통학하면 되는지 다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입학 직전 설날 때, 학교 통학하는 방법 알려주겠다고 본인이 외우신 걸 읊조리셨다. 나중에 대학원은 서울대로 가니까 취직은 비록 안 해도 내심 서울대 타이틀에 되게 좋아하셨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지하철 타고 버스도 마을버스 타야 한다고 어디서 들으셨는지 나에게 통학 방법에 대해 일깨워 주셨다. 내심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내가 학교 간판으로 숙원을 이뤄준 셈이라 하겠다. 



10.

공부란 뭘까? 어렸을 적부터 막연히 머리에 품고 살았고 대학원 와서 가장 많이 질문했던 문구다. 대학원 와서는 막상 눈앞에 닥친 학과목 공부들이 너무나 버거웠고 논문 주제 잡는 건 지금도 상당히 고통스럽다. 난 언제나 공부에 대해 적당히 타협하면서 하다가 답답하면 속으로든 주변 친구들에게든 솔직히 많이 징징거렸다. 문득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며, 할아버지 세대에서는 공부가 말 그대로 사람 구실 제대로 하려고, 생계를 위한 수단, 더 나은 세계로 나가기 위한 도구였다고 생각한다. 요새는 다양한 도구들이 생겼고 공부가 사람과 상황에 따라선 사실 크게 쓸모가 없다. 더군다나 대학원 공부도 그렇고. 왜 난 유학을 마음에 품게 되었을까? 그 기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동안 내 인생에서는 밥벌이할만한 재주가 그나마 공부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름 공부에 대해 좋았던 기억들을 떠올려보며 공부도 뭐 퍽이나 나쁘진 않지 생각했던 거 같기도 하고, 기왕 공부하는 거 한 번 더 넓은 세계에서 박살 나더라도 부딪혀보자 이런 마인드가 아니었을까 싶다. 할아버지의 인생을 들으면서 지금 할아버지가 이런 환경을 꾸려오고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던 건 어려운 상황에서도 더 배우려는 그런 마음과 노력들이 있었기에 내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난 할아버지랑 분명히 다른 세상이지만 저런 인생도 퍽이나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단은 유학 가고 싶은데 후 이번에 바로 갈 수 있으려나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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