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마 복학 이후부터인가 명절 때 할아버지, 할머니를 뵙고 나면 예전보다 늙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고 느꼈던 거 같다. 할아버지는 워낙에 잔소리와 말이 많으셔서 가끔 같이 앉아있기가 힘들었는데 그래도 꾸역꾸역 들었다. 듣다 보니 할아버지는 한국 근현대사의 변화를 직접 산전수전 다 겪으셨다. 초등학교 4학년 올라가며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었고, 중학생 때 6.25 전쟁이 났으며, 대학생 때는 419 혁명으로 데모도 많고 나라가 참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그에 반해 나를 돌이켜 보면, 초등학교 참 편하게 다녔고, 중학교 때는 학교에서 소풍 가는 날 생기면 으레 친구들과 그전에 쇼핑 가서 무슨 옷 입을지 고민하고 엄마에게 투정 부리고, 대학교 때는 연애에 정신 팔리고, 술 먹고 노는 게 참 즐거웠다.
2.
이 글을 쓰기에 앞서 부끄럽지만 난 역사, 정치에 크게 관심도 없고 잘 모른다. 다만, 할아버지가 직접 겪으신 일들을 그냥 듣고 흘리기엔 아쉽고 명절 때마다 반복해서 듣다 보니 계속 잊어버리는 게 아쉬워서 남기고자 한다. 모든 글에 할아버지, 할머니는 별다른 말이 없다면 외가 쪽이다.
할아버지는 황해도 연백군에서 태어나셨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연백 구청 공무원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가기 전에는 서당에 다니면서 한자 공부를 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4학년 전까지는 일제 강점기었기에 일본어 공부도 열심히 하셨다고 한다. 당시엔 초등학교만 나와도 교육이 충분하다고 여겼기에 중학교 가서 교복을 입으면 주변에서 쳐다봤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 일본인들이 물러가며 갑자기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부족하게 되다 보니 심지어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초등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는 교육을 워낙에 중시하셨기에 할아버지는 엄청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운 좋게 중학교에 진학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학교 다니면서 6.25가 터졌고 말 그대로 정신없던 그런 상황이라 일단 남으로 피난을 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당시 소련군, 중국 공산당을 매우 매우 혐오했다. 특히 소련군을 '로스케'라고 불렀는데 어원을 찾아보니 한국어 및 일본어로 러시아인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라 한다. (러시아인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인 '루스키(Русский : 이 말에는 본디 비하의 의미는 없다.)' 위키백과 참조) 그도 그럴게 미국인들은 가만 보면 되게 점잖았다고 한다. 물론 절대 일반화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전반적으로 미국인들은 한국인들에게 살갑게 대하고 초콜릿도 주고 인상이 좋았다고 한다. 반면 러시아, 중국인들은 정말 닥치는 대로 마을 휘저으면서 여자만 봤다 하면 겁탈하려는 사례가 너무나 많았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살았던 마을에서도 그런 일들이 정말 많았고 눈앞에서도 봤고 마침 딸들의 아버지가 있을 때 그런 일들이 벌어지면 총이 있건 말건 사람들은 죽을 기세로 덤벼들었다고 한다.
얼추 전쟁이 정리가 되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할아버지는 체신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당시 국가에서 정보통신 전문 인력을 양성을 위해 막대한 투자를 했었고, 기숙사 제공 및 교육비가 무료였고 심지어 급여도 줬다고 한다, 전쟁 후 돈 없고 공부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대거 지원을 했다고 한다. 입학 경쟁률이 2~30:1이었다고 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여기 지원했다가 떨어졌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피난 오다 보니 가진 것도 없었기에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고 한다. 그렇게 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학교 다닌 조건으로 지금의 광화문 KT 건물에서 공무원으로 의무 최소 3년을 일해야 했다고 한다. 분야는 할아버지가 가신 곳을 포함하여 6개인가 있었는데 통신선 놓는 거로 안 가실걸 꽤나 후회하신다 했다. ㅋㅋ당시에 한창 전국적으로 통신선을 설치할 때라 돈을 엄청 잘 벌었다 했다. 무튼 할아버지는 원무과로 가셨다. 당시 동급생, 선후배들이 KT 회사에서 다 주요직들을 맡으신 분들이라 하셨다. 현재 KT 회사의 가장 출발점이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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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취직은 했지만 할아버지는 공부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당시에는 버스 노선이 지금처럼 세분화돼있지 않았기에 대학을 가도 사대문 안에서 무조건 가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성균관대, 동국대 중에서 고민을 하다가 동국대 국어국문학과를 가셨다 했다. 그래서 직장 시간을 쇼부쳐서 낮에는 학교, 저녁에는 직장에 계셨다 했다. 퇴근하고 좀 지나면 통행금지 시간이었기에 집 가기 바빴다고 했다. 학부 시절도 바로 직장을 가야 했기에 서클 (동아리) 활동을 한 번도 못해보신 게 아쉽다 하셨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어차피 군대를 가야 하니 병무청에 직접 찾아갔다고 한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대대적으로 군대 안 갔던 사람들을 먼저 보내다 보니 막상 병무청을 찾아가도 일 년 뒤에 자리가 난다고 했다. 그래서 실직자로 계속 있을 순 없고 돈도 없고 해서 급하게 장교 시험을 준비해서 바로 임관하셨다. 요새는 장교가 3년이라 할아버지 시대는 길어야 5년이겠거니 했는데 무려 8년을 지냈다 하셨다. 사병들은 뒤늦게 끌려온 사람들이 많아 3~40대도 꽤 많았다 했다. 할아버지 군 생활 시절 얘기도 참 많이 들었는데 지금은 사실 많이 희미해졌다. 얼핏 기억나는 건 확실히 지금처럼 식사 배급이 원활하지 않아 상당히 많이 고생하셨다. 전역 후 일자리를 알아보셨는데, 전공을 살려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으로 취직해서 거의 30년을 강의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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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선생님을 하면서 우연한 계기로 할머니를 만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기까지 정말 인생이 파란만장했고 많은 일을 겪으셨다. 그래서일까 고등학교 선생님 시절 결핵에 걸리셨다. 당시엔 결핵에 대해서 마땅한 치료제가 없었기에 걸리면 거의 죽는다 여겨졌다. 할머니는 집안의 반대로 공부를 초등학교까지 밖에 못하셨다. 그래서 할아버지 급여만 바라보고 뒷바라지하셨는데 갑자기 비상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애 셋이나 있는데 큰일 났다. 앞으로 어떻게 애들을 키우나 억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고 하셨다. 그래서 할머니는 용한 약들 수소문을 해 서대문 쪽에 유명한 뱀장수 집을 찾아가셨다. 당시 어머니는 어렸을 때 호기심이 무척이나 많으셨는데, 한 번은 용기 내서 할머니를 쫓아갔다고 했다.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하셨다. 뱀장수 집을 가니까 소쿠리들이 꽤 많았는데 그 소쿠리를 열면 뱀이 수십 마리 우글거렸다고 한다. 그리고 뱀장수들은 특유의 그 눈매가 있어서 되게 서슬 퍼런 눈빛 느낌이 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알고 보니 뱀이 엄청 고단백 식품이라 한다. 허재 농구선수도 선수 시절 꽤나 뱀 먹었다고 한다. 할머니 어머니 왈, 뱀장수나 뱀을 많이 먹어본 사람들은 그 특유의 눈매가 있어서 딱 보면 알아본다고 한다. 무튼 할머니가 2년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뱀 사골국? 뱀 즙인가 헷갈리긴 한데 정성스럽게 뱀 달인 한약으로 할아버지께 드렸고 다행히 완쾌하셨다고 한다. 이때 이후로 체력도 정말 많이 좋아지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올해 88세인데도 불구하고 정정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