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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고집 Aug 03. 2024

구의 증명

너를 품고 살아남을게, 천 년 후에도 기억할게.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소설 속에서 구와 담은 각자의 이름과 비슷하게 살아간다.

구의 경우 숫자 9와 舊(옛 구)자가 연상된다. 숫자 10이 채 되지 못한 미완, 미성숙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옛날의 생명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처럼 담 역시 작가의 의도인지 그 뜻과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일정한 공간을 감싸는 '담'처럼 소설 속에서 구를 감싸고 또 감싸며 그 경계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둘은 하나가 된다.


제목 <구의 증명>은 담의 식인 행위 자체를 의미하는 것 같다.

담이 구를 잡아먹는 일은 곧 구가 이 세상에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애처로우면서도 기괴한 모습은 이성 간의 단순한 사랑보다는 두 인간 개체로서의 사랑으로 조금 더 무겁게 다가온다. 비극적이고도 희극적인 그들의 이야기는 일상 속에서 소곤댔던 소니빈 소설과도 같게 느껴진다. 혼자 남은 담이(둘이 함께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괜스레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아서 그들도 소니빈 소설처럼 진짜 같은 가짜인지, 가짜처럼 꾸며진 실화인지 헷갈리게 된다. 


https://w.wiki/ApY4 

(최진영, 『구의 증명』, 은행나무(2015), p157)

잠이 안 와.
구의 몸을 부둥켜안으며 중얼거렸다. 내 품에 들어온 구의 심장이 나보다 늦게 뛰었다. 그게 다 느껴졌다.
얘기해줄까?
나지막한 목소리로 구가 물었다.
응.
옛날에 소니 빈이라고 있었어.
소니 빈?
응. 사람 이름이야.
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 




어떻게 인간은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사랑의 깊이와 색은 운명처럼 결정되는 걸까?

구와 담의 사랑은 너무 깊게 파인 구멍이다. 벽에는 시멘트가 잔뜩 발려져 있는 그들만의 방공호 같다. 어처구니없게도 가장 중요한 덮개가 없어 비가 오면 물에 잠기고 그렇게 고인 물은 점차 썩어갈 것만 같다. 짜증이 날 정도로 순진하다. 그 사랑의 색은 어떨까? 검정이다. 뒤죽박죽 모든 색이 뒤섞여 결국 거무튀튀해지고 마는. 더러운 사랑이라며, 별 볼 일 없는 사랑이라며 대충 비웃고 말 그런 색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색을 품은 검정에서 명암과 명도를 적절히 배합한 특별한 색을 찾는다. 그리고 그 색에 '우리의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빽빽한 숲에서 유일하게 길을 아는 청설모처럼 재잘거린다.


그들의 사랑은 '너를 품고 너를 위해 살아남는 것.' 

'너를 먹고 함께 살아내는 것.' 

'천 년 뒤의 마지막 인류가 되어 너를 기억하는 것.'


최진영 작가는 이 글을 쓰는 한 달 동안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1월, 한 달 내내 바깥으로 거의 나가지 않고 방구석 일인용 의자에 앉아 구와 담의 이야기만 썼다. 그래서인지 나의 새해는 아직 오지 않은 것 같고, 어쩌면 영영 오지 않을 것 같고, 지난 겨울은 전혀 없었던 것 같고, 눈 떠보니 모든 게 꿈이잖아... 그런 느낌이다. 내가 쓴 글인데도 내가 쓴 글 같지 않다. 그런 묘한 기분에 휩싸여 재교를 봤다. 글을 쓰다가 지치거나 불행해지면 벗어놓은 옷처럼 축 늘어져서 '9와 숫자들'의 <창세기>란 곡을 들었다. 삼 분이 조금 넘는 곡인데, 한 번만 들어야지 하다가도 반복재생을 걸어놓고 한 시간 넘게 듣곤 했다. 그 노래를 들을 때만큼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쓸쓸하고도 귀한 시간이었다. 지나고 나니 글을 쓸 때의 감각보다 그 곡을 듣던 때의 감각이 더 생생하게 남아버렸다." 
(최진영, 『구의 증명』, 은행나무(2015), p175-176)

https://youtu.be/ajERPzx02Ps







(최진영, 『구의 증명』, 은행나무(2015), p163-165)

사람이란 뭘까.

구를 먹으며 생각했다. 나는 흉악범인가. 나는 사이코인가. 나는 변태성욕자인가. 마귀인가. 야만인인가. 식인종인가. 그 어떤 범주에도 나를 완전히 집어넣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인가. 아이는 물건에도 인격을 부여하지만 어른은 인간도 물건 취급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무럭무럭 자라면서 우리는 이 세계를 유지시키고 있다. 사람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다. 사람은 뭐든 죽일 수 있고 먹을 수 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친다.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고 작살낼 수 있다. 그리고 구원할 수도 있다. 사람은 신을 믿는다. 그리고 신을 이용한다. 사람은 수술을 하고 약을 먹어서 죽음을 미룰 수 있다. 불을 다루고 요리해서 먹는다. 불을 다루기 전에는 생고기 생풀을 그냥 먹었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 인간은 동족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배가 고프면, 배만 부르면. 허기 때문이 아니라도 먹었을 것이다. 그의 손이 탐나서. 그의 발이 탐나서. 그의 머리, 그의 얼굴, 그이 성기가 탐나서. 지극히 존경해도 먹었을 것이고 위대해도 먹었을 것이다. 사랑해도, 먹었을 것이다. 그들은 미개한가. 야만적인가. 지금의 인간은 미개하지 않은가. 돈으로 목숨을 사고팔며 계급을 짓는 지금은. 돈은 힘인가. 약육강식의 강에 해당하는가. 그렇다면 인간이 동물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가. 세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동물의 힘은 유전된다. 유전된 힘으로 강한 놈이 약한 놈을 잡아먹는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있는 사람도 살지 못하고, 돈이 있으면 죽어 마땅한 사람도 기세 좋게 살아간다. 

노마는 왜 죽었을까.

이모는.

구는 왜 죽었나.

교통사고와 병과 돈. 그런 것이 죽음의 이유가 될 수 있나. 성숙한 사람은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이는가. 그렇다면 나는 평생 성숙하고 싶지 않다. 나의 죽음이라면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죽어보지 않아서, 죽는 게 어떤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홀로 남겨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안다. 지겹도록 알겠다. 차라리 내가 죽지. 내가 떠나지. 전화부스에서 서른 걸음 떨어진 으슥한 곳에서 구를 찾아냈을 때, 구의 몸은 상처와 멍으로 가득했다. 눈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코는 뭉개졌고 앞니가 빠져 있었다. 아픈지, 많이 아픈지, 나는 묻고 또 물었지만 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구를 끌어안고서 새벽이 오도록 구의 서른 걸음을 상상했다. 죽어가며 간신히 움직인 그 의지를, 뼈와 근육을, 구의 마음을, 어떤 상상도 견딜 수 없어 차라리 나의 뇌를 꺼내 내팽개치고 싶었다. 

구는 길바닥에서 죽었다.

무엇이 구를 죽였는가.

나는 사람이길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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