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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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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이림 Jul 05. 2024

어린 시절 이야기

엄마와 딸

엄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4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엄마는 6시간 30분에 걸친 자궁 전체를 들어내는 수술을 하였고,
2차 항암까지 끝냈고, 3차 항암을 기다리는 중이다.

처음 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벌어질까.

어린 시절 형편이 좋지 않았던 우리 집은 항상 돈에 시달리며 살았다.
브랜드 신발이 뭔지 몰랐고, 동네 신발가게나 온라인 마켓에서 판매하는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브랜드를 처음 인지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미술 시간이었다. 운동화 그리기를 하기 위해서 집에서 그리고 싶은 운동화를 들고 오라고 했다. 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비싸고 예뻤던 언니의 캔버스화를 몰래 빌려 갔는데, 친구와 같은 신발이지만 영어 철자가 조금 달랐다.
집에 와서 이 신발은 무슨 신발인지 열심히 검색해 봤는데 컨버스 짝퉁이란다…. 짝퉁 신발을 신나게 들고 가서 그림 그리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다행히도 친구들은 눈치 못 챈듯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짝퉁이라는 단어를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게 되었다.

그렇게 새로운 신발을 사기 위해 엄마 속을 긁어가며 돈을 모았다.
내 첫 브랜드 신발은 중학교 2학년 때인데, 세일기간에 가장 저렴하게 판매했던 2만 원짜리 반스 신발이다.
키가 크면 당연히 발도 같이 크는 줄 알았던 나는 지난해 230을 신었으니 235로 구매했다.
현재 내 발 크기는 210-220이다. 그 당시 크기도 맞지 않는, 쿠션도 없는 신발을 신고 다녔으니 체육 시간마다 발이 쿡쿡 아팠던 건 당연했던 일이다.
비가 올 때면 신발이 젖는 게 너무 싫었다. 다음 날 마르지 않으면 신고 갈 신발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 웅덩이를 밟아 양말까지 젖을 때면 누구보다 빠르게 집으로 가서 신발 안에 신문지를 끼워 물을 흡수시켰다.
그래도 잘 마르지 않으면 헤어드라이어를 동원해 신발을 말리고, 다음 날 학교로 갔다.
친구가 비에 신발이 젖어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신발을 신고 왔다며 투덜댄 날, 머리에 뭔가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아…. 비가 오면 신을 다른 신발이 있는 거구나. 나는 이 신발뿐인데…. 신발이 두 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겨울이 되었다. 교복 마이위에 걸칠 옷이 없었다. 사실 초등학교 6학년 때 엄마가 8만 원을 주고 사줬던 패딩이 하나 있었는데, 뒤에 미키마우스가 크게 그려져 있어서 입고 싶지 않았다. 학교에는 노X페이스, 뉴X, 네X, 아X다스 등 들으면 아는 브랜드 옷을 입은 친구들밖에 없었으니까…. 미키마우스 패딩을 입으면 친구들이 비웃을까 무서웠다.
부모님께 찡찡거렸다. 나만 겨울옷이 없다고…. 아빠가 2만 원을 보태줄 테니 옷을 사라는 말에 신나게 인터넷을 뒤졌고, 이틀 동안 꼼꼼하게 검색한 뒤에 2만 6천 원짜리 기모 후드집업을 구매했다.
물론 브랜드도 없는 옷이었지만, 깔끔하고 단정한 내 겨울옷을 구매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겨울 내내 그 옷 하나로 학교에 다녔다.

중학교 3학년 내가 사고 싶은 것을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결심했다.
오일장 신문과 교차로신문을 뒤져 아르바이트하고 싶다고 문의했고, 중학교 3학년은 안 된다는 말만 돌아왔다.
그러다 한 국밥집 면접을 가게 되었는데, 시급 4,000원만 줘도 좋으니 제발 일 시켜달라고 사정을 해서 알바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6시부터 9시까지 3시간을 일했는데 한 달을 일하니 약 27만 원 정도 받았다. (사장님이 조금 더 챙겨주셨다) 첫 월급으로는 동생이 먹고 싶다고 했던 음료를 사줬다. 기뻐하는 동생을 보니 이게 행복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날 ABC마트에서 신발 세일을 하길래 내 신발 하나, 동생 신발 하나를 사 들고 집에 들어갔다.
동생이 기뻐하니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세일하는 신발은 형광색이었는데 너무 튀는 색이라 결국 한 번도 못 신었다고 한다) 첫 월급을 받고, 며칠이 지났다.
엄마와 아빠가 카드값 낼 돈이 없다며 다투는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와 아빠가 돈 때문에 싸우는 게 싫었고, 우리 집이 가난한 게 싫었다.
아빠에게 카드값이 얼마냐고 물어봤더니 14만 원이라고 했다.
내 월급에서 남은 돈이 14만 원 정도였고, 아빠에게 빌려주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나는 다시 돈이 부족했지만, 다행히도 아빠 카드값은 막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항상 돈이 부족했고, 돈 때문에 벌어지는 상황들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부터 아르바이트했고, 학업 대신 돈 벌기를 선택했다.
언니가 대학교 졸업 후 취업하고, 동생이 고등학교 졸업 후 열심히 공부해서 직장을 갖게 된 이후에는 각자 생활비를 벌었고, 먹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것들은 부족함 없이 살 수 있게 되었다.
셋이 돈을 모아서 부모님께 선물을 살 수 있었고, 배달 음식은 꿈도 못 꿨던 학창 시절과는 달리 매주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수 있었고, 6개월에 한 번 가던 외식은 매달 할 수 있게 되었다.

맛있는 음식들을 먹으며, 지난 세월을 회고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꿈도 못 꿨는데, 정말 우리 형편 아주 좋아졌다."
행복한 일들이 쌓여만 갈 때면 힘들었던 지난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엄마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알게 된 이후에는 행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야 안정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몇 날 며칠을 울며 팅팅 부은 상태로 일을 하고, 퇴근하고 또 울고…. 반복된 삶이었다. 무엇을 위해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모두가 원망스러웠다.
희망을 품고자 엄마 병에 대해 검색을 해보았더니 여성 사망률 1위란다.
생존율도 너무 낮았다. 앞으로 엄마와 얼마나 더 함께할 수 있을까…. 너무 무서웠다.

그러다 문득 매일 울며 시간을 허비하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고, 이렇게 허비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내 생각보다 암 환자들은 많았다는 것, 엄마와 같은 병명 병기이지만 아직도 살아계신 분들, 생존율은 단순히 수치일 뿐이라는 것을…. 그때부터였다. 오랜 암 투병에도 오래 살고 계신 분들이 어떤 생활 습관으로 지내는지, 난소암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알아보기 시작했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엄마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초보 보호자지만, 나는 엄마와 오래오래 함께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어린 시절 엄마 속을 덜 썩였더라면,
엄마한테 조금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병이 찾아오지 않았을 수도 있으려나?

지금이라도 엄마한테 더 잘해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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