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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kaya Lee Dec 08. 2015

검은 마리아보다 나를 위무하는 것

도시를 걷다 - #9 Barcelona



살면서 누구에게나 그런 류의 기회가 흔히

주어지지는 않는 법이지.

그러나 '어쩌다가'- 정말 어쩌다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인생의 이벤트가

마법처럼 반짝, 하고 이루어지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내게 있어 그 마법이란 '장기여행자'로서의 변신을 꾀하는 일이다.





이국의 한 도시에서 '흡사 생활인'의 신분을 얻어 오래도록 지내다 보면,

여행자로서는 자각할 수 없던 사소하고 미묘한 부분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길들여진다'는 건 어린왕자 이야기 속 여우의 말마따나

아련하고 감성 충만한 현상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어느 때부터인가 깨닫기 시작하게 되었지, 많은 나날들에서.


신기하고 감탄스럽기만 했던 것들이 차차 윤기를 잃어가고,

때로는 불합리함과 진부함에 

때로는 극복할 수 없는 이질적인 거리감에 새삼 탄식하게 되는 그런 나날들.

머리 고무줄이 탄성을 잃어 묶어 올린 머리칼이 슬슬 처지기 시작할 즈음,

분명 어느 순간, 한 템포 느슨해지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눈에 스치는 풍경 하나하나가 아쉬워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던

성능 좋은 카메라의 무게가 점차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하루하루 점심과 저녁 식사 모두를 어느 멋진 곳에서 시도해볼까-

궁리하며 즐거워하다가 어느 새,

동네 슈퍼마켓의 세일 품목을  한 아름 사들고 돌아오는 자신을 발견하고,

주말마다, 미처 상인들이 장사를 개시하기도 전부터 달려가 서성이던

벼룩시장의 번잡스러움이 귀찮아질 때,

더 이상 가방에서 구깃한 지하철 노선도를 꺼내들지 않게 되었을 때,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 속 타인들의 얼굴 거웃이 하루의 무게감이

희부옇게 내려앉아 있음을 발견할 무렵


문득 집구석 책상 위에 올려두고 온

화분의 목마름이 걱정되기 시작하면.............









멀리 나가는 '달리는 것'을 잡아탄다.

익숙함이 나태의 모양새를 갖추고

나를 잠식하려 할 때에,

조금 더 신선한 공기를 다잡으러

새로운 곳으로, 나가본다.





그래서, 어느 하루

몬세라트Montserrat로 향했다.

















































































































성가대 앳된 소년들의 목소리는

청량하게 금빛 공간 안에 울려 퍼졌고


















정말이지 엄청나게 오랜 시간을

기다려서야 간신히 '영접'할 수 있었던

검은 마리아La Moreneta

생각보다 작고 겸허했으며


일렬로 줄을 서서 한두 명씩

좁은 공간 안으로 들어가는 통에

제대로 눈을 맞추고

인사를 건넬 틈도 없었다.













오늘 하루를 온전히 이곳에서 보낼

요량이었으므로, 언덕을 오르는

푸니쿨라 승차가 포함된 표를 구매했었다.

대부분이 그러하겠지만....

아주아주 가파른 경사를

큰 소리 없이 조용히 우우웅 오른다.


자연의 조화가 빚어낸 아름다움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어서,

어느 순간에든 어느 방식으로든

우리를 위로하고 다독일 수 있다는 것을

느끼러...................

간다.
















그렇게 몬세라트의 등허리를 마주한다.











































도시 너머까지 시야에 들어오는 맑은 공기와

아무 꾸밈도 없는 투박한 바위 덩어리 돌산들이

꽤나 감동을 줄 줄은, 미처 몰랐다. 

딱히 엄청난 '절경'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발아래 깔린 구름들과

손에 잡힐 듯한 푸르른 하늘이면

충분한 것이었구나.













제법 아찔한 돌산 언덕배기

끄트머리까지 마냥 걸었다.

두어 시간을 하염없이 거닐기만 하는데도

지루하다거나 지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생각보다

이 말없는 산책에

동행하고 있는 이들이 꽤 많다.














그렇게 홀린 듯 자연을 마주하고 나서,

경박스럽게도 돌아오는 길 그날의 야간 분수쇼를 보러 광장으로 향했다.

호불호가 제법 갈리는 평을 얼핏 본 터라, 괜한 발걸음은 아닌지 자못 걱정스러웠으나

동행의 손을 잡고 오붓하게 앉아 한밤의 분위기에 젖어들어본다면

그렇게 못 봐줄 정도의 수준도 아니었다.

오히려 바르셀로나를 처음 방문한 이들이라면,

낭만적 하루의 피날레를 장식하기에

나쁘지 않을 선택일 정도로, 의외의 감흥을 주었달까. 





삶 속에서 지내고 있으므로, 아무리 큰 일탈을 겪었다 해도

금세 삶 속으로 다시 녹아드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어느 하루 짧은 소풍으로 인해 앞으로의 무수한 나날들에

청량제가 되어줄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었으니

치장 따위 없는 자연의 민낯은 실로 막강하달까......

장기여행자는 이래저래 많은 곳에서, 위안과 생기를 얻어낸다.

바르셀로나의 밤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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