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9살 작은 꼬마 아이가 자기 몸뚱아리의 두 배 되는 사람들 틈에 끼어 다니면서 그 복잡한 서울 지하철역 노선 중에 가장 먼저 외운 길은 고속터미널에 가는 길이다. 고속터미널 지하에 영풍문고가 있었기 때문이다.(반디 앤 루니스로 바뀐 후로는 아직 그곳에 서점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초등학생 시절, 나에게 주말은 엄마랑 서점에 가는 날이었다. 점심 먹고 느지막이 고터에 도착하면, 서점 옆에 있는 요거프레소에서 요거트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엄마랑 나눠먹고 서점을 가는 것이 루틴이었다. 그렇게 서점에 들어가면 나는 저번주에 읽다 말던 시리즈의 다음 책을 한 권 집고, 등을 기대기 편한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땅바닥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점이 문을 닫는 저녁 10시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때로는 내가 CSI 과학 수사 반장이었고, 때로는 내가 고양이 학교에 다니는 고양이였으며, 때로는 내가 피겨스케이팅을 하는 김연아 선수였다. 책 한 권을 다 읽을 동안 근 몇 시간을 그렇게 미동도 없이 책 속에 빠져 있다가 서점이 문을 닫을 때쯤에 엄마가 앉아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울 때에서야 그 속에서 빠져나오곤 했다.
초등학생 시절 나의 장래 희망은 삽화가였다.(물론 부모님은 내가 삽화가가 되고 싶다 하면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그때는 왜ㅠㅠ?!!??! 이랬지만 이제는 이해가 된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니 자연스레 글을 쓰는 것에도 두려움이 없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 때까지 문예백일장에 나갔다 하면 상은 따놓은 당상이었으며, 이과였음에도 불구하고 내 생기부는 '문예창작대회', '~~ 에세이대회', '~~ 수기쓰기대회' 등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 매주 주말 서점을 가던 나는 중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매주 주말에 서점 대신 학원을 갔다.
고3 그리고 재수, 2년 간의 수험 생활동안 내가 그리던 대학 생활에는 글이 있었다. 대학생이 되면 블로그도 쓰고, 책도 출판해 보고, 소설도 써보고, 작사도 해봐야지. 그런데 막상 대학을 오고 나니 글을 쓸 시간이 없었다. 1학년 때는 시간이 나면 친구들 만나고, 술 마시고, 연애하고, 술 마시고, 술 마..ㅅㅣ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전공 공부하랴 대외활동 하랴 글을 쓸 시간은커녕 책을 읽을 심적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점점 활자와 멀어지고 무의식적 스크롤에 더 익숙해져 갔다.
대학교 동아리에서 알게 된 친구가 한 명 있다. 그리 친하진 않지만 길 가다가 만나면 인사하고 서로 인스타그램을 맞팔로우 하며 종종 근황을 확인하는 딱 그 정도 친분이다. 어느 날 우연히 그 친구의 부계가 친구추천에 떠서 팔로우하게 되었다. 그 부계에는 그 친구가 쓰는 블로그가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친구들의 블로그를 봐왔다. 1년 전쯤부터 네이버 블로그 챌린지가 유행하면서 주변에 일상 블로그를 쓰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전공상 티스토리나 깃허브에 테크 블로그를 쓰는 친구들도 많다. 그런데 이 친구의 블로그는 달랐다. 일상 블로그도 아니고, 테크 블로그도 아니고, 뭐 광고나 이슈를 다루는 양산형 블로그도 아니었다. 반고흐나 뭉크 같은 화가들이 그림을 수단으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는 것처럼 그 친구는 글로 자신의 마음속 심연을 드러내었다. 주로 빈곤했던 삶을 지낸 화가들이 자신들의 삶을 반영하듯 그림들이 다 칙칙하고 어두운 것처럼, 그 친구의 글 또한 심오하고 우울했다. 하지만 아름다웠다. 블로그가 아니라 하나의 문학 작품을 읽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친구를 보고 대학 와서 처음으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한히 아래로 스크롤을 내리던 중 어떠한 알고리즘으로 인해 '슐튀르미디어'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알게 되었다. '긴 글 읽는 사회 만들기'를 목표로 내세우며 창작 글이나 매거진 글들을 콘텐츠로 업로드하는 미디어이다. 다른 인스타 매거진 계정들은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화제나 키워드를 중심으로 콘텐츠로 생성했다면, 슐튀르미디어는 작가들의 경험담이 담긴 개인적인 글들이 너무 짧지도, 너무 길지도 않게 딱 적당한 분량으로 업로드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전체적인 계정 분위기가 너무 내 취향이었다.
슐튀르미디어의 편집장이 글쓰기 수업도 운영한다. 너무 많지도 않게 딱 적당히 5-6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주어진 시간 동안 집중해서 글을 쓴다는 것이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왔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맞지 않아 신청하지 못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신청하고 싶다.
글쓰기 스터디는 하지 못하지만 이제는 진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글을 쓰고 싶다.
예전에 학회를 같이 했던 언니가 학회 알럼나이 톡방에 북클럽 추가 인원을 모집한다는 글을 올렸다. 한 달에 한 권의 고전 문학을 선정해서 한 달 동안 그 책을 읽고, 패들렛에 간단한 독서 후기를 쓰고, 한 달에 한 번 오프라인으로 만나서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며 책을 더욱 곱씹어보는 모임이었다. 안 그래도 어떤 장르의 책이든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더욱이 고전문학은 이런 모임이 없다면 절대로 읽지 않을 것 같아 강제로라도 한 달에 책 한 권은 읽어보자라는 생각으로 북클럽에 들어가게 되었다.
드디어 저번주에 처음으로 북클럽 모임에 나갔는데, 결과적으로 너무 만족스러웠다. 만나서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없다면 그저 무의식 속으로 사라질 책의 내용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잔잔한 파동을 계속 이어나가는 느낌이었다. 더 자세한 북클럽 후기는 도서 리뷰와 함께 다음번 글로 찾아오겠다.
글을 쓰고 싶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에 문예창작대회 나갔을 땐 지우개로 한 번 지우지 않고 술술 썼었던 것 같은데 지금 이 글을 쓰면서 한 문장을 치면서도 쓰고 지우고를 수만 번 반복하고 있다. 술술 쓰이지 않는다. 나이를 먹으면서 글에 생각이 많아진 걸까, 글에 눈이 달린 걸까, 아님 그냥 글을 잃어버린 걸까.
당연히 필력이 한순간에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꾸준히 글을 쓰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에 술술 써 내려가고 있지 않을까. 그저 이 글을 쓰는 시간이 전공 공부와 일상으로 무뎌진 내 감성을 자극하는 하나의 낭만으로 다가오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