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십구 년 이월의 이야기
다섯 살 하고도 반.
누리 견생에 가장 큰 변화라면 오빠와 언니가 직장인이 되면서 집을 떠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 역시 딸아이가 집을 떠나 혼자 생활하게 된 것이 적잖이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인 건지 딸은 누리를 보기 위해 주말마다 집으로 내려왔다. 두 시간 거리를 직접 운전해서.
영월보다 열 배는 큰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딸은 누리와의 산책을 손꼽아 기다렸다. 누리가 보고 싶고 함께 산책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 이면에는 맑은 공기에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영월에서 주말을 쉬고 싶은 이유가 잔뜩 웅크리고 있었나 보다. 설경을 보며 밀린 대화를 하느라 평소보다 산책시간을 훌쩍 넘기기 일쑤였다.
외국계 회사가 내민 연봉에 매료되어 합격의 기쁨을 누렸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막상 현실 직장생활에서 딸은 슬기롭지 못했다. 먼 타지에서 낯선 사람과의 사택 생활,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세먼지 자욱한 출퇴근길, 집과 회사 외에 만날 사람도, 친구도 없는 도시인의 삶이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했던 걸까. 잠들기 전 항상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는 눈치였다.
자주 그 대상은 엄마인 나였고, 스피커폰을 통해 누리의 이름을 부르는 조금은 상기된 목소리는 집에 오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아 통화 종료음마저 짠하게 여운이 남았다. 또 금요일 밤 대문에서 달려 들어오며 언니 왔어!라고 말하는 소리는 애절함과 반가움이 절절해 딱할 정도였다.
그렇게 우리는 매주 금요일 밤을 상봉의 기쁨으로 벅차게 보냈다. 그래서일까 딸은 다음날 산책에도 공을 들였다. 아침 식탁에 앉아 제일 먼저 산책시간을 나와 맞췄고 누리를 앉혀 놓고 몇 시에 어디로 갈 거라고 설명까지 했다. 누리는 언니의 말을 알아듣는지 연신 꼬리를 흔들며 입꼬리가 내려올 줄 몰랐다.
세 시에 산책을 간다면 두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한 딸은 가슴줄과 배변봉투를 일찌감치 챙겨 신발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딸의 모습은 엄마보다 누리가 더 많이 보고 싶었음을 명확히 보여주었지만 동생을 챙기는 언니처럼 기특하면서도 대견스러웠다.
아들과 딸은 성향이 정반대다. 아들은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편으로 시골의 정서나 관계적 환경을 답답해했다. 예를 들면 '좋은 게 좋은 거야, 다 아는 처지에 웬 유난이야?'라든가. 한두 다리만 건너면 혹은 알려고 마음만 먹으면 한 집안의 족보까지 꿰뚫을 수 있는 익명성 부재의 시골문화에도 부정적이었다.
반면에 딸은 일상 가까이에서 자연을 느끼며 여유롭게 사는 것을 삶의 최우선에 두었다. 사실 딸도 사춘기 때에는 큰 도시에 나가 삶의 크기를 더 키우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더랬다. 누리와 산책을 하면서 자연과 친해졌고 그 자연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면서 삶의 방향을 틀고자 했다. 이렇게 살아도 행복하구나라고.
그런 성향의 딸이 산업적으로 발달한 대도시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으니 외로움이나 고독감에 시달릴 건 뻔한 이치였는데, 높은 연봉의 대가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회사생활 이 년이 지나면서 딸은 혼자 점심을 먹기 시작했고 스트레스는 최고점에 달했다.
너무 힘들면 그만두라는 나의 조언에도 딸은 버텨보겠다고 했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겠노라고. 그 버팀의 마지노선은 삼 년이었다. 삼 년이 지난 후에도 생각의 변화가 없다면 쿨하게 그만두겠다면서.
그런 마음을 안은 채 산책길에 나선 온 가족.
아마도 딸은 산책길에서 만큼은 회사 일을 잊어버리는 듯했다. 출발하기 전부터 누리와 똘이에게 무슨 옷을 입힐까 궁리하고 산책길에서 인생샷을 건지겠다며 누리와 똘이에게 모델 포즈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집에 와서 피곤에 떨어진 누리 옆에 누워서 혼잣말을 했다. 드르렁드르렁 누리가 코를 골거나 말거나.
“누리야, 넌 좋겠다. 밥 먹고 산책하고 잠자고, 걱정이 없으니. 언니는 힘들어. 넌 모르지? 모르는 게 낫긴 하다… 언니도 너랑 살고 싶다, 집에서.”
그리고 그런 날 밤에는 꼭 마당으로 나가 별을 봤다.
누리는 또 언니를 따라 나가고.
둘의 뒷모습이 다정해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애써 따라나서지 않았다.
어쩌면,
조금은 슬퍼 보여,
눈물이 찰랑거릴 수도 있을 것 같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