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과목명: 어른의 기술
남자는 울면 안 되고, 여자는 뛰면 안 된다. 어른이라면 감정 표현을 절제해야 하며, 언제나 진지하고 근엄해야 한다. 우리가 배워온 '어른'의 정의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스무 살 성인이 되면 대단한 변화가 생길 줄 알았다. 하지만 고등학생 때의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여전히 열일곱 살의 나였다.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어른이라는 문을 열고 '짜잔!' 하며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동시에 우리 부모님과 조부모님 세대가 떠올랐다. 그분들은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어른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가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의젓함'이라는 말에 갇힌 아이들
내 나이 어느덧 30대 후반. 어머니가 나를 낳으셨던 나이보다 열 살은 더 먹었다. 본인을 내려놓고 삼 남매를 키워내려 아득바득 사셨던 그 삶의 무게를 나는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아마 부모님 세대는 그렇게 길러지셨을 것이다. 무던하고, 강인하며, 참을성이 좋아야 한다. 그것이 '좋은 가족 구성원'의 조건이었던 시대였다.
"의젓하구나", "어른스럽구나." 이 칭찬 앞에 서 있었을 아이들의 모습이 상상된다. 군말 없이 어른들의 말을 따르고, 예의 바르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아이. 옷을 더럽히지 않고 친구와 싸우지 않으며, 부모처럼 동생들을 돌보는 아이. 하지만 그 의젓함 뒤에 숨겨진 아이의 진짜 얼굴은 무엇이었을까.
작년쯤 지인 모임에서 그런 아이를 보았다. 똑 부러지게 말하고 공손하며, 남자아이임에도 무릎에 흙 한 번 묻히지 않는 '완벽한 아이'였다. 하지만 그 아이를 보는 내내 안타깝고 안쓰러운 감정이 가시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내와 나는 같은 이야기를 나눴다. 예전 같았으면 칭찬 일색이었을 그 아이의 절제된 모습이 왜 이토록 우리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에 대하여.
아이다움의 기준이 바뀌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요즘 아이들은 웃기면 웃고, 슬프면 운다. 우쭐함과 철딱서니 없는 무해한 모습,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아이다움'이다. 그러나 그날 본 아이는 스스로를 너무 일찍 통제하고 있었다. 그 얌전함 뒤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이 안쓰러웠던 것이다. 사회가 바뀌면서, 이제 '아이다운 아이'의 기준도 변하고 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어른의 매력도 마찬가지다. 최근 유행하는 '너 T야?'라는 밈은 단순히 성격 유형을 묻는 것이 아니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 정확히는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얼마나 갈증과 불편함을 느끼는지를 보여준다.
나 역시 소위 말하는 '대문자 T'다. 하지만 T라고 해서 공감을 못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표현하지 않도록 길러진 것뿐이다. 나의 유년 시절 역시 그 아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사회화된 T, 감정 지능의 시대로
다행히 지금의 배우자를 만나 대화 방식을 고쳐나갈 기회를 얻었고, 예술 계통에서 만난 수많은 'F' 친구들을 통해 감정을 학습하고 경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지금은 꽤나 '사회화된 T'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내가 이전의 내 대화방식을 방식을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던 게 아니라 그것이 '정답'이라 믿고 살아왔다는 점이다. 감정을 숨기는 것이 미덕인 환경에서 자랐기에, 그것이 듬직함이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전혀 다르다.
이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결국 ‘감정'만이 남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지식이나 정보, 자산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사랑받는 시대는 지났다. 감정의 이해도가 높을수록 지능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으며, 그런 사람 곁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과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를 '구김살이 없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면서도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밝고 상냥한 태도. 이제 무표정하고 무신경한 태도는 도태의 지름길이다. 무뚝뚝함을 미덕으로 알고 자란 나와 닮은 대문자 T들이여, 우리는 이 변화하는 환경에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해 나가야 한다.